손주항 전 의원이 1970년대 말 옥중 당선, 의원직 상실 등 자신의 민주화운동 경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뒤쪽에 그의 서각과 서예 작품이 보인다.

"험난한 60여년 정치 역정에서 정신적 안정을 되찾아주고 격려했던 것은 어릴 적 어머니에게 배운 서예였다."

그림처럼 힘차게 꿈틀거리는 특유의 글씨체는 노(老)정객 손주항(孫周恒·80) 전 의원의 굴곡진 삶과 닮았다. 정치와 예술이라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분야를 넘나든 그다. 손 전 의원은 "평생 붓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며 "서예는 험난한 정치 역정을 지키는 힘이 되기도 했고, 정치 규제에 발목이 잡혔을 때는 서러움과 한(恨)을 토로하는 친구였다"고 했다.

26일 서울 광화문 사무실에서 만난 손주항은 "오늘의 정치가 융통성이 없고 경직된 것은 정치에 예술이 가미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훌륭한 예술 작품이 보여주는 여백(餘白)의 미를 정치에도 적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요즘도 명절 연하장이나 편지를 쓸 때 먹 갈고 붓 들어 지인들에게 안부도 전하고 세상에 대한 울분도 토한다"고 했다. 각종 서예·서각·공예 작품으로 가득 찬 그의 사무실은 여느 서예가의 작업실 같다. 이곳에서 전통문화예술인들의 모임인 '손주항 사랑방'이 열린다.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사로 이름을 날린 그는 17세 때 국전(國展·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서예가로, 그동안 4차례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서각(書刻) 솜씨도 뛰어나 지난해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로부터 서각 명인으로 지정됐다.

손 전 의원은 정치가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외숙인 진직현씨가 전북 임실에서 출마하자 당시 중학생이었던 그는 외숙의 선거를 도우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27세 때 전북 도의원을 시작으로 9·10대 국회의원(임실·남원·순창)에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특히 1978년 12월 10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돼 옥중에서 치른 선거에서 승리해 '옥중 당선' 기록을 세웠다. 1988년(13대)에는 평화민주당으로 전주에서 출마해 거물 정치인 이철승씨를 누르고 3선 의원이 됐으나 이후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결별해 반DJ의 길을 걸어왔다.

손주항 전 의원의 서각작품 ‘존심인후(存心仁厚)’.

손 전 의원은 "정치인은 백성의 눈총, 백성의 입줄, 백성의 앙칼을 무서워해야 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나라가 바로 선 이후에야 여(與)도 있고 야(野)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정치인들이 잊어선 안 된다"고 했다. 정치를 떠났지만 정치는 평생의 관심사라 요즘도 정치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는 민주화 세력에 대해 "1970~1980년대 우리 사회의 소금이자 방부제 역할을 했는데 요즘에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손 전 의원은 지난해 자신의 민주화 투쟁기 '백전노병 손주항'(상)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하)를 펴냈다. 이 책은 정치 성명서, 법정 진술, 옥중 서신, 칼럼 등을 통해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그는 1970년대 말 이후 옥살이와 의원직 상실, 정치 규제 등 수난을 겪었다. 정치인으론 황금 같은 시기인 4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까지 10여년을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박탈된 채 암흑의 세월을 보낸 것. 그는 "취직도 안 돼 아내가 보험 팔러 다니고 동대문 시장에서 담요와 옷을 떼어와 장사하면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손 전 의원은 2005년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1300여만원의 생활 지원금을 받았다. 하지만 이 금액은 그의 민주화 운동 경력의 일부만 반영했을 뿐이다. 그는 "당시 위원회에서는 생활 지원금을 일단 지급하고, 옥중 당선과 의원직 상실, 10여년 동안 정치 활동 금지 등에 대해서는 전례(前例)가 없으니 구체적 보상 기준이 만들어지는 대로 정식 피해 보상은 나중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올 초 2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미 생활 지원금을 받았으니 보상금을 추가 청구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는 "생활 지원금은 구금 일수(362일)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일 뿐, 정신적 손해나 10여년 정치 활동 금지 기간의 경제적·정신적 피해까지 산정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손 전 의원은 또 "생활 지원금 수령 서류에 같은 사건으로 다시 보상금을 청구하지 않겠다고 서약한다는 문구가 있다고 해도 당시 경제적으로 궁핍해 생활에 쫓긴 데다 모든 청구권을 포기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서약은 진정한 의사 표시라고 볼 수 없다"며 "궁핍한 상황에서 일부 보상을 받았으니 나에게 발생한 손해 전부를 청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손 전 의원은 자신의 정치 인생에 대한 회오(悔悟)도 털어놓았다. 그는 "여야를 왔다 갔다 하는 철새 정치인들이 보기 싫어 무소속으로 주로 활동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며 "우리 정치 현실상 정당이 없는 무소속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