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결혼을 앞둔 김모(34)씨는 최근 부서를 옮기면서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동료들은 "가벼운 우울증일지 모르니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며 "요즘은 가벼운 증세로 진료받으면 정신과 기록이 남지 않는다더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김씨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동네 정신과 의원에서는 우울증 검사도 하지 않고 약도 먹지 않아야만 소위 '정신질환 코드(F코드)'를 달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김씨는 기록이 남으면 승진 등 사회생활에 지장이 있을까봐 치료를 포기했다.

1년 지나도록 유명무실한 Z코드

보건복지부는 '가벼운 정신과 치료를 받아도 정신질환자로 낙인찍힌다'는 사회적 편견을 없애기 위해 지난해 4월 정신과 외래에서 약물 처방을 받지 않으면 의사가 F코드 대신 'Z코드(일반 상담)'로 건보료를 청구할 수 있게 했다. F코드 대신 Z코드로 건보료를 청구하면 정신질환명이 기록에 남지 않는다. F코드가 있으면 보험 판매사 단계에서부터 보험 가입이 거부되는 경우가 많고, 취직·승진 등에서도 불이익을 받을까봐 정신과 치료를 꺼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신질환에 걸린 적이 있는 사람 중 15.3%(2011년 복지부 통계)만 상담이나 치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 국가인데도, 자살의 주원인인 정신과적 질환을 방치하는 현실이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보험이사를 맡았던 이상규 교수(한림대학교병원)는 "학교 폭력을 당하고도 정신과 기록이 남을까봐 치료받지 않는 학생이 있을 정도로 정신과 치료에 대해 거부감이 큰 것이 문제"라며 "정신과 의사를 아예 만나지 않는 것과, 한번 만나는 것은 치료에 큰 차이를 만든다"고 제도 시행 배경을 설명했다.

이 때문에 'Z코드' 확대는 부정적 시선이나 사회적 낙인 효과를 일부라도 해소해 가벼운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적기에 치료받을 수 있게 하자는 조치였다. 그런데 제도를 시행한 지 1년이 지나도록 정작 진료 현장에서는 유명무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의 한 대학 병원은 최근 1년간 Z코드를 쓴 환자가 5명에 불과했다.

검사·약물처방 가능해야

본래 취지대로라면 가벼운 우울·불안증으로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은 Z코드를 적용받을 수 있어야 한다. 최근 늘고 있는 자폐증이나 ADHD·학습장애는 검사와 약물 치료가 꼭 필요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Z코드를 쓰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게 소아정신과 개원의들 얘기다. 경기도에서 소아정신과를 운영하는 한 개원의는 "Z코드를 쓰면 수가를 삭감당하기 때문에 성격 검사나 우울증 검사를 하지 못한다"며 "한두 번의 상담만으로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에 Z코드는 현실과 맞지 않는 정책"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정신과 상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스트레스·불면증도 약물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Z코드를 쓰면 약물을 처방할 수가 없어 결국 F코드를 넣어야 하는 현실이다.일부 개원의는 "심리 검사나 일정 기간의 약물치료를 Z코드와 함께 가능하게 해야만 제도의 취지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복지부 이중규 정신건강정책과장은 "보다 실효성 있는 정책적 대안을 고민해보겠다"고 말했다.

☞Z코드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질병분류에 따라 각 질병을 A~Z로 분류한 것 중에 현재 질환은 없지만 상담이나 건강관리 등 보건 서비스를 받을 때 쓰는 코드다. 반면 ‘F코드’는 우울증·불면증·ADHD·정신분열증 같은 정신질환을 일컫는 상병 코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