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엽씨가 늘 갖고 다니는 비닐 담요를 펼쳐보였다. 비상시 체온 유지용이다. 아래는 그의‘생존팩’에 든 장비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포도당 캔디, 파이어스타터, 라이터, 파라코드 팔찌, 손전등, 방독면, 호루라기, 나침반, 맥가이버 칼.

"출근길 지하철에서 갑자기 불이 난다고 생각해보세요. 점심에 식당에서 밥 먹다가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어요. 휴가철 수상 레포츠를 즐기다가 급류에 휩쓸린다면요? 다 남의 일 같겠지만, 우리 주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프레퍼(prepper)' 우승엽(41)씨가 배낭 안에서 쉼 없이 장비들을 꺼냈다. 프레퍼는 재앙·재난에 대비해 평소 철저히 준비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우씨는 어딜 가든 열 가지 물품은 갖고 다닌다. 파이어스타터(부싯돌처럼 불을 피우는 도구)·라이터·파라코드 팔찌(낙하산 줄 10m를 꼬아 만든 팔찌)·맥가이버 칼·호루라기·나침반·방독면·비닐 담요·손전등·포도당 캔디.

"휴대용 생존팩(EDC: everyday carry)입니다. 일상의 구명조끼죠. 최소한의 생존 도구들인데 다 합쳐서 무게는 800g이고, 값은 3만원 정도예요. 매달 보험료는 몇십만원씩 내면서 왜 자기 생명을 지킬 장비에는 투자하지 않는 걸까요?"

그가 괴짜일까? 재작년까지 우씨는 보통 회사원이었다. 군 제대 후 중소기업에서 전산시스템 관리 업무를 해왔다. 그러면서 10년 넘게 틈틈이 재난 상황에서의 생존법을 연구해왔다. 그러다가 직장을 접고 이를 정리해 최근 '재난시대 생존법'(들녘 펴냄)이란 책을 냈다. 세월호 참사 후 생존 비법들을 적극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가 2010년 개설한 재난 대비 인터넷 카페 회원 수도 올 들어서만 30%나 늘어, 1만명에 이른다.

"한국에서 프레퍼들은 '유난 떤다'는 주위 시선 때문에 숨어 지내요. 하지만 근래 인식이 바뀌었어요. 대형 사건과 사고 때문에 누구나 '저런 상황이 언제든 내게도 닥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직장 동료들에게도 비밀로 한 채 프레퍼로 활동해온 우씨도 얼마 전에야 '커밍아웃'했다. 사무실 책상 밑에 72시간 생존에 필요한 식량과 장비를 담은 2㎏짜리 배낭을 몰래 두었던 그다.

책에 실린 노하우들은 우씨와 카페 회원들이 직접 실험하고 연구한 것들이다. "북한이 도발하면 전쟁에 대비한다며 라면을 사재기하는데 비상식량으론 부적합해요. 보존 기간이 4~5개월밖에 안 되거든요. 차라리 건조 국수가 낫죠. 산소흡수제와 함께 페트병에 넣어 보관하면 2~3년도 거뜬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