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가 영국과 진정한 ‘남남’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영국)는 인종부터 다르다. 스코틀랜드는 켈트족, 잉글랜드는 앵글로색슨족으로 구성됐다. 피로 얼룩진 전쟁의 역사도 존재한다. 1300년 스코틀랜드를 침공한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는 저항군을 이끌던 스코틀랜드의 독립영웅 윌리엄 월리스를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했다. 이 이야기는 영화 ‘브레이브 하트’로 만들어졌다.
이런 두 나라가 한 나라로 통합되게 된 배경에는 ‘왕실 혈통의 얽힘’이 있다.
1603년, 평생 독신으로 산 엘리자베스 1세는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 국왕인 제임스 6세를 왕위 계승자로 지목했다. 제임스 6세는 스코틀랜드 왕실 혈통뿐 아니라 잉글랜드 왕실 혈통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6세의 어머니인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 여왕은, 잉글랜드 국왕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인 헨리 8세의 누나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로 건너가 ‘제임스 1세’로 잉글랜드 왕위에 즉위한다. 그리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국가의 왕위를 겸하는 최초의 왕이 된다. 그는 재임 동안 화폐를 통일하고, 두 국가의 국기를 섞은 ‘유니언 잭(영국기의 초기모델)’을 만드는 등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스스로를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의 왕’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의 통합정책에 힘입어 약 100년 후인 1707년 두 국가는 합쳐진다.
하지만 합병 후에도 잉글랜드는 자치법과 독자적 사법제도를 유지했으며, 수천년간 쌓여온 민족감정도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잉글랜드와 프랑스팀이 축구경기를 하면 스코틀랜드 주민들은 프랑스를 응원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재임한 1970년대부터 두 국가 간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대처 총리의 강력한 민영화 정책 추진으로 스코틀랜드의 경제의 버팀목이 돼온 조선·철강업 등 중공업산업이 줄줄이 곤경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부터 분리 독립 정서가 서서히 불기 시작했고, 독립을 내건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이 집권 여당이 되면서 2011년 결국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를 하기로 했다.
스코틀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될 경우 영국 내 북아일랜드, 웨일스 등의 독립 문제까지 불거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에 성공한 아일랜드 사례도 있다. 아일랜드는 12세기 영국 왕가의 침략을 받고 영국의 식민지가 됐으며, 1801년 결국 영국과 합병됐다. 합병 후에도 영국의 압제와 차별에 시달리던 아일랜드는 1916년 공화국을 선포하고, 1919년 ‘부활절 봉기’를 시작으로 게릴라 전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1921년,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를 제외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아일랜드 독립 투쟁의 과정은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