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남부 칼라하리 사막의 산족(族)은 사냥을 떠날 때면 선인장과 닮은 '후디아'란 식물을 씹었다. 이렇게 하면 오래 굶어도 배고픈 줄 모른다. 수천 년간 전해 내려온 산족의 전통 지식이었다. 영국 제약회사 파이토팜사(社) 등은 지난 2001년 이 식물에서 식욕 억제 성분을 찾아내 다이어트 신약 개발에 나섰다.
그러자 아프리카 원주민의 생물자원과 전통 지식을 허락 없이 활용해 돈벌이하려는 데 대해 영국 언론들이 "생물자원 해적질(biopiracy)"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산족은 협상 끝에 파이토팜사 등으로부터 이익금의 6%를 로열티로 받는 데 합의했다. 이처럼 특정 국가의 토착 생물자원과 지식이 수탈당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막는 국제협약이 발효해, 세계 각국이 '종(種)의 전쟁'에 돌입할 전망이다. 29일 강원도 평창에서는 '제12차 생물다양성협약(CBD) 당사국 총회'가 개막해 다음 달 17일까지 열린다. 특히 총회 기간 중인 다음 달 12일에는 '생물·유전자원의 접근 및 이익 공유에 관한 나고야 의정서(나고야 의정서)'가 발효된다.
◇나고야 의정서 10월 12일 발효
'나고야 의정서'는 지난 2010년 유엔 생물다양성협약(CBD) 당사국 총회에서 채택됐다. 지난 7월 14일 50개국이 비준했고, 그로부터 90일이 지난 올해 10월 12일 의정서가 발효된다. 이 의정서에 따라 세계 각국은 이날부터 △특정 국가가 보유한 생물자원(동·식물은 물론 미생물까지 망라)을 허가 없이 가져다 쓸 수 없고 △타국의 생물자원과 전통 지식을 활용해 이익이 생길 경우 자원 보유국과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
영국 언론의 문제 제기 덕분에 자기 권리를 챙길 수 없었던 산족 같은 사례가 원천적으로 예방돼 자원 보유국의 지위가 높아지는 반면, 생물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로서는 산업계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산족의 '후디아' 같은 생물자원 분쟁 사례는 지금까지 여러 번 있었다. 불교 경전에도 등장하는 인도의 멀구슬나무 '님(neem)'은 살충제, 가려움증 치료 등에 탁월한 효능을 보여 인도에선 '축복받은 나무'로 불렸다. 1995년 미국 화학기업(그레이스)이 이 나무에서 뽑은 기름으로 생물농약을 만들어 특허를 따자 인도 측이 맹비난에 나서 결국 특허가 취소됐다.
자국의 생물자원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의 토종 식물 '팔각회향'을 원료로 만든 타미플루다. 2009년 신종플루 공포로 전 세계가 떨 때, 스위스 제약사 로슈는 타미플루를 만들어 3조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팔각회향 보유국인 중국은 타미플루 판매로 생긴 이익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중국은 조만간 국내법을 정비, 이 같은 사례에 대응할 전망이다.
◇국내 업계, 연간 5000억원 추가 부담 예상
나고야 의정서가 발효되면 국내 바이오 산업계와 소비자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생물 유전자원의 약 70%를 수입해 쓴다. 환경부에 따르면 국내 바이오 업계가 타국에 로열티 지급 등으로 추가 부담해야 할 금액은 수백억원에서 많게는 연간 5096억원(로열티 5% 가정) 정도로 추정된다.
특히 국내 한의계가 비상이다. 중국이 나고야 의정서의 (생물자원 활용법에 관한) '전통 지식' 새 규정에 주목하고 있어 중국과의 분쟁에 휘말릴 소지가 커졌기 때문이다. 김태호 대한한의사협회 홍보이사는 "중국은 고려 인삼까지 자국 한약재의 일부라고 주장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며 "중국이 한약에 대한 이익 공유를 요구할 경우 한약 값이 뛰는 것은 물론 인삼 등과 같은 생물자원을 두고도 분쟁이 생길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에게도 제품 가격 상승이라는 불똥이 튈 수밖에 없다. 해외 천연 성분을 수입해 생산하는 화장품의 경우에도 상당한 원가 상승이 예상된다.
한국지식재산연구원 허인 박사는 "나고야 의정서가 발효되면 각종 특허권 등록이나 자원 수입 과정에서 국제 소송전이 잇따를 수 있다"며 "기업들은 각국 생물자원의 반입·반출 규제 현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정부는 중소기업 등에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등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나고야 의정서
다른 나라 생물자원을 이용해 약이나 화장품 등을 만들어 이익을 얻으면 원산지 국가와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의정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