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크리스마스이브를 하루 앞둔 12월 23일, 국민이 반길 만한 내용의 정부 공고가 광고란에 실렸다. 12월 24일 자정부터 새해 1월 3일 새벽 4시까지 '야간 통행 금지'를 임시로 해제한다는 발표였다. 연말연시에 한해 밤거리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도록 특별히 허락됐다. 평소의 2배가 넘는 인파가 명동 거리가 좁다 하고 술 마시며 휘젓고 다녔다(조선일보 1962년 12월 25일자).

연말연시에 야간 통금을 10일간이나 푼다는 공고. 사진은 1982년 야간 통금 전면 해제 후 등장한 ‘서울 야경 관광’(조선일보 1962년 12월 23일자, 1982년 1월 10일자).

밤낮없이 놀고 일하는 오늘의 시민들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광복 후 37년간 한국인들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집 바깥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야간 통금제(通禁制)는 광복 후 미 군정 때 질서 유지를 위해 임시로 도입한 것인데도, 권위주의 정권들은 '국가 안보' '범죄 예방' 등의 명목 아래 존속시켰다. 전시(戰時)도 아닌 평시 통금이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것이었다. 그 시대 밤문화는 오늘과 완전히 달랐다. 술집마다 시간에 쫓기며 들이켜느라 '한국인들의 술 마시는 속도는 세계 제일'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1982년 1월 9일자). 자정이 넘으면 모든 거리는 쥐새끼 한 마리 없이 정적만 감돌았다. 곳곳에 군·경 합동 검문소가 설치됐다. 단속에 걸리면 새벽까지 파출소 신세를 지고 벌금을 물었다. 한밤 검문에 불응하고 질주하던 택시 운전기사가 군인들의 총격을 받아 중태에 빠지는 사건까지 일어났다(1972년 8월 26일자).

통금 시대에 정부는 크리스마스나 대통령 취임일 등에 한해 선심 쓰듯 통금을 하루 이틀씩 반짝 해제했다. 1962년 연말 열흘씩이나 풀어준 건 이례적이다. 이에 앞서 그해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1주년을 맞아 16일간이나 통금을 풀었다. 통금 시대에 단행된 가장 긴 해제였다. 정부는 외국 관광객들을 위한 것이라 했지만,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의 민심 달래기라는 측면이 있었다. 밤거리를 돌아본 송요찬(宋堯讚) 내각수반은 '이같이 질서를 지킨다면 통금이 필요 없을 듯"하다고까지 밝혔다(1962년 5월 5일자). 하지만 그 뒤로도 통금은 20년이나 이어졌다. 전면 해제된 건 1982년 1월 6일 밤부터다. 5·16 이듬해의 임시 해제처럼, 1982년의 전면 해제도 집권한 신군부의 유화책(宥和策)인 셈이었다. 밤을 되찾은 시민들은 한풀이라도 하듯 거리로 쏟아져 나와 새벽 서울시청 시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1982년 2월 6일 '애마부인'의 심야상영이 첫선을 보이자 5000여명이 몰려 극장 유리창이 깨지고 경찰이 출동했다. 통금 시대에 쌓인 야간 활동의 갈증은 그렇게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