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의 방 유리창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림자는 커다란 날개가 돼 퍼덕인다. 드라큘라 백작이 온 것이다. 루시는 드라큘라 백작에게 홀려 그를 따라나선다." "서아프리카에서 1만5000여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그중 6000~7000여명이 코와 입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갔다. 치사율이 무려 50~70%나 됐다."
앞의 이야기는 아일랜드의 작가 브람 스토커가 1897년 발표한 소설 '드라큘라'에 나오는 장면이고, 뒤는 올해 지구를 공포로 몰고 간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뉴스이다. 두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박쥐다. 드라큘라 백작은 커다란 박쥐로 변해 루시를 찾아갔다. 에볼라 창궐 지역을 돌아보고 이달 초 방한한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크리스티앙 브레쇼 소장은 "에볼라의 원인은 박쥐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드라큘라 백작의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었던 것일까.
에볼라 바이러스는 1976년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처음 발병했다. 에볼라란 이름은 병이 처음 발견된 지역 주변의 강 이름이다. 2005년 과학자들은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에볼라 바이러스는 숲 속 과일박쥐에서 유래했다"고 발표했다. 과일박쥐 피에서 에볼라 바이러스의 고유 유전자가 확인된 것이다. 실제로 에볼라가 발병한 지역에는 박쥐가 많이 산다. 이곳 사람들은 박쥐나 원숭이 등 야생동물 고기를 즐겨 먹는다. 박쥐에서 사람으로, 아니면 박쥐에서 원숭이 등 다른 동물을 거쳐 사람으로 바이러스가 전해질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게다가 과학자들은 박쥐의 피에서 에볼라 외에 광견병, 니파병, 급성호흡기증후군(SARS), 마르부르크병,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등 치명적인 질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들도 발견했다. 작년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연구진의 연구로는 쥐는 몸에 179종의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 중 68종이 사람에게 감염된다. 박쥐에는 137종의 바이러스가 있는데 61종이 사람에 감염된다. 쥐가 조금 더 많아 보이지만 한 종(種)당 인수(人獸) 공통 감염 바이러스는 박쥐가 1.79종으로 쥐의 1.48종보다 많았다. 이름과 달리 박쥐는 쥐와 상관이 없다. 분류상 박쥐목(目)으로 쥐가 속한 설치목과 구분된다.
왜 유독 박쥐에게 무서운 바이러스가 많을까. 일단 박쥐는 몸무게로 따지면 다른 포유류보다 3~10배는 오래 산다. 또 수만 마리가 몸을 맞대고 같은 동굴에 산다. 박쥐가 사는 동굴은 바이러스에게 최적의 배양실인 셈이다. 그렇지만 박쥐가 먼저 바이러스에게 당하면 사람에게 바이러스가 옮아갈 가능성이 사라진다. 결국 박쥐가 치명적 바이러스의 숙주(宿主)가 된 것은 스스로는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쥐는 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류다. 잠시 활강을 하는 날다람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비행술을 자랑한다. 중력을 이기고 하늘은 날려면 엄청난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만큼 신진대사가 활발해져 체온이 섭씨 40도까지 올라간다. 바이러스는 고온에 약하다. 박쥐가 바이러스를 몸에 지니고도 멀쩡한 이유다.
또 마치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처럼 바이러스로 인한 유전자 변형을 스스로 보정하는 능력도 있다. 비행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체내 활성산소 농도를 높여 DNA에 치명적인 돌연변이를 유발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2012년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박쥐에서 스트레스에 저항하는 탁월한 DNA 수리 능력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덕분에 바이러스가 공격해도 유전자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박쥐가 에볼라 바이러스의 숙주로 밝혀지자 당장 아프리카에선 박쥐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중남미에 사는 흡혈박쥐를 빼면 대부분의 박쥐는 곤충과 과일을 먹고 산다. 해충을 먹고 꽃가루받이를 도와 농사에 이로움을 주는 존재다. 박쥐 한 마리가 하루에 모기 6000마리를 먹는다고 한다.
심지어 흡혈박쥐도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 베네수엘라 과학자들은 1990년대 후반 흡혈박쥐의 침에서 피가 빨리 흐르고 잘 굳지 않게 하는 단백질을 발견했다. 연구진은 흡혈을 돕는 이 단백질에 드라큘라의 이름을 따 '드라큘린(Dracul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피가 굳어 혈관을 막으면 뇌졸중이 일어난다. 과학자들은 드라큘린으로 뇌졸중을 치료할 항응혈제(抗凝血劑)를 개발하고 있다.
사실 질병 확산의 근본 원인은 박쥐가 아니라 사람일지 모른다. 박쥐는 1억~6600만 년 전 지구에 나타나 지금까지 기나긴 진화 과정을 통해 치명적 바이러스와 함께 사는 법을 터득했다. 사람과도 별 탈 없이 공존했다. 문제는 인간에 의한 생태계 파괴였다. 브레쇼 소장은 "최근 에볼라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진 것은 사람이 박쥐가 사는 밀림을 파괴해 둘 사이 접촉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애먼 박쥐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중세의 마녀사냥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