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슈투트가르트에 2005년 문을 연 벤츠박물관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에 뽑힐 만큼 뛰어난 건물이다. 벤츠 120년의 자랑이 가득한 이곳에 언뜻 봐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시 코너가 있다. 2차대전 때 벤츠를 돌아보는 곳이다. 안내판에 이렇게 써 있다. '우리는 히틀러의 전쟁 무기 생산에 가담했다. 이를 위해 강제징용된 노동자를 많이 썼다. 이들은 수용소에서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다.' 옆에는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현장이 당시 그림으로 걸려 있다.

▶개인이나 조직이나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어두운 과거를 털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철강 회사 크루프는 100년 사사(社史)에 나치 시절 직원들이 "하일 히틀러!" 하며 오른손을 번쩍 치켜든 사진을 실었다. 책에는 나치에 부역했던 이 회사 주인이 패전 후 미군 헌병 지프에 끌려가는 사진까지 있다.

▶유명 패션 브랜드 후고 보스는 나치 히틀러청년단과 SS친위대 제복을 만들었다. 2011년 이 회사 지원을 받아 출간된 책은 '설립자 후고 보스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치에 협력했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고 못 박았다. 그가 일찍부터 히틀러를 신봉하며 자기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다고 했다. 히틀러 요구에 따라 '딱정벌레' 닮은 국민차를 만들어낸 폴크스바겐은 아예 강제 노역 기념관을 세워 신입사원이 의무적으로 견학하도록 하고 있다. 과거를 직시하려는 이런 노력들이 모여 '반성할 줄 아는 나라' 독일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 끔찍한 짓을 우리가 했습니다.' 일본 규슈대 의학부가 태평양전쟁 때 미군 포로에게 했던 생체 실험을 70년 만에 고백했다는 기사가 어제 조선일보에 실렸다. 89세 된 당시 의대생이 살아 있는 미군의 폐를 떼어내고, 미군 혈관에 바닷물을 주입했다고 증언했다. 규슈대는 4일 의학역사관을 열면서 생체 실험 만행의 실상을 전하는 기록물을 진열했다.

▶2차대전 전쟁 물자를 생산하던 공장들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리려는 게 일본 정부다. 홋카이도 한 마을이 강제징용된 조선인 위령비를 세우려 하자 일본 우익은 "매국 마을 수산물 불매 운동을 벌이겠다"고 협박해 중단시켰다. 이런 분위기에서 규슈대의 고백은 용기 있는 일이다. 작년엔 100세 된 일본인이 70여년 전 도쿄 근처 비밀 연구소에서 세균 병기와 살인 광선 개발에 참여했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일본 보통 사람들 중에는 그래도 양식(良識)과 용기를 가지고 과거를 똑바로 보려는 이들이 많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