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웃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고/ 새는 울어도 눈물을 보기 어렵네(花笑聲未聽 鳥啼淚難看).'
고려시대 시인 이규보가 여섯 살 때 썼다는 한시(漢詩)다. 꽃은 어린아이도 시인으로 만든다. 다 큰 시인들은 꽃 앞에서 어린아이로 돌아가 시를 줍는다. 시인들은 시를 쓴다고 하지 않고, '시가 내게로 왔다'고들 한다. 시는 꽃향내를 타고 시인의 가슴에 날아든다. 봄날에 시인은 꽃과 꽃 사이를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꿀벌이 된다.
잔뜩 물오른 봄의 향내가 짙어지는 4월이다. 벚꽃과 목련이 세상을 밝히고 산수유와 개나리도 어깨동무하며 길을 치장한다. 이맘때마다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가곡 '4월의 노래'다. 목련이 허공에서 화사한 등(燈)을 밝힐 때 귓가에서 하늘거리는 나비처럼 다가온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박목월(1915~1978) 시인이 노랫말을 지었다. 1953년 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청소년들에게 희망의 언어를 속삭이기 위해 펜을 들었다고 한다.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둔다'는 노랫말이 들어간 까닭이 그러했다.
박목월은 "여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여학생들이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는 자세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며 "나무 그늘 아래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책을 읽거나 긴 사연의 편지를 쓰는 것은 스무살 전후의 소녀적인 낭만과 정서를 대표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여학생들의 애창곡이 됐다. 그 시절 그 노래를 부르던 소녀들이 가장 예뻤을 때였다. 하필이면 전후(戰後)의 폐허에서 인생의 봄을 맞았다. 그래도 소녀들은 목련꽃 그늘 아래에서 가슴 설레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 모습을 상상하면 안쓰럽다. 봄날의 화창함이 오히려 짙디 짙은 설움의 물감처럼 가슴 한편을 물들인다.
지난 주말 조선일보 Books팀이 정현종 시인에게 꽃나들이 갈 때 읽을 시 5편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정현종 시인은 "꽃을 보러 가는데 시가 따로 필요 있겠느냐"고 타박하면서도 서정주의 시 '백일홍 필 무렵'을 비롯해 5편을 골라줬다. 그 중에 정현종 시인이 번역한 파블로 네루다의 시 '봄'도 들어 있었다. 그 시를 던져줄 테니 읽어보곤 6살 어린이 이규보의 시와 비교해보시라.
'새가 왔다/ 탄생하려고 빛을 가지고/ 그 모든 지저귐으로부터/ 물은 태어난다// 그리고 공기를 풀어놓는 물과 빛 사이에서/ 이제 봄이 새로 열리고/ 씨앗은 스스로 자라는 걸 안다/ 화관(花冠)에서 뿌리는 모양을 갖추고/ 마침내 꽃가루의 눈썹은 열린다// 이 모든 게 푸른 가지에 앉는/ 티 없는 한 마리 새에 의해 이루어진다'
'시가 내게로 왔다'는 표현이 바로 네루다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네루다의 시는 새와 꽃이 날라다 준 것이다. 네루다가 이 시를 썼을 때의 나이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마음의 나이테는 여섯 살 어린이와 별 차이가 없었던 듯하다. 아이는 놀람을 통해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된다고 한다. 시인은 늘 보던 꽃을 새롭게 보면서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다. 네루다는 새의 지저귐에서 물의 탄생을, 화관(花冠)에서 뿌리의 신생(新生)을 읽고 티 없는 한 마리 새처럼 순수한 영혼의 언어로 노래했다.
봄철 꽃나들이 갈 때 시와 산문과 사진을 통째로 음미할 수 있는 책 한 권이 있다. 소설가 조용호가 오래 전에 펴낸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가 손에 잡힌다. 꽃의 문학 기행을 떠나는 길을 알려준다. 작가가 섬진강 매화, 구례 산수유, 유달산 개나리 등을 찾아가 맡은 꽃내음을 사진으로 찍고 산문으로 액자를 만든 기행문이 꽃구경 가는 길을 화사하게 포장한다.
작가는 굳이 개나리 보러 유달산에 가선 개나리 노란색으로 망막을 적시며 시 한 편을 꺼내든다. 김사인의 시 '개나리'다. '한번은 보았던 듯도 해라/ 황홀하게 자지라드는/ 저 현기증과 아우성 소리/ 내 목숨 샛노란 병아리 떼 되어/ 순결한 입술로 짹짹거릴 때/ 그때쯤 한번은/ 우리 만났던 듯도 해라…'라고 읊어본다. 개나리에 얽힌 남다른 사연이 있을 성싶은 작가는 꽃비에 젖은 나비처럼 중얼거린다. "추억은 곤충채집하듯 어떤 기억을 뇌수에 꽂아둔 영원한 현재형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어쩔거나, 개나리가 순결한 입술로 그때처럼 짹짹 거리며 아무리 위무해도 그리운 얼굴 보이지 않으니."
꽃은 꽃의 형상을 한 창(窓)인 듯싶다. 꽃을 통해 사람은 꽃 너머 혹은 아득한 시간 저편을 보게 된다. 가뭇없이 사라져간 지난 봄의 꽃 향기처럼 잊혔다가 올봄에 되살아나는 순수의 순간이 돌연 꽃을 통해 이승에 그림자를 슬쩍 떨구나보다. 그래서 이성복 시인은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라고 노래했던가.
봄이 절정(絶頂)을 향해 치달을 때 몸이 느끼지 않는다면 봄이 얼마나 서운할까. 어차피 갈 봄인데 섭섭지않게 놀아주다가 보내는 게 사람이 할 짓이다. 그 어떤 느낌이, 시선이 닿는 곳곳에서 넘실대는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