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사이 운전기사의 '입'에 무너진 유력인사들이 끊이지 않았다. 운전기사의 증언은 결정적이다. 유력인사의 동선(動線)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운전기사가 자신이 모시는 인사의 비리에 대해 증언하면 빠져나가기 어렵다. 그래서 정치권과 재계에선 "운전기사를 조심해야 한다"말이 돌았다.
지난해 6월 새누리당 박상은 의원 운전기사 A씨는 의원 차량에 있던 현금 3000만원과 서류뭉치가 들어 있는 가방을 검찰에 넘겼다. 검찰은 이 돈의 출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박 의원과 관련한 비리 연루 의혹을 파헤쳤고, 결국 박 의원은 기소됐다.
2012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됐던 현영희 전 의원도 운전기사 입 때문에 의원직을 잃었다. 공천 받게 해달라며 부산시당 홍보위원장에게 5000만원이 든 쇼핑백을 전달했는데, 이를 지켜봤던 운전기사가 선거가 끝나고 선관위에 신고했다. 검찰 관계자는 “운전기사의 증언은 비리 수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조금은 '다른' 운전기사가 있었다. 검찰이 29일 불구속 기소한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의 운전기사 김모(60)씨다. 그는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 회장의 회장실과 비서실 보안을 맡았던 직원 오모(38·불구속 기소)씨에게 "박삼구 회장의 일정을 빼돌려 달라"고 청탁한 혐의를 받았다. 박삼구 회장과 박찬구 회장은 2009년부터 그룹 경영을 두고 심각한 갈등을 빚어 왔다. 지난해엔 박찬구 회장 측이 형인 박삼구 회장을 배임 혐의로 고소해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오씨는 김씨의 부탁을 받고 2012년 2월부터 2013년 11월까지 56회에 걸쳐 박삼구 회장의 일정표를 사진으로 촬영(36회)하거나 눈으로 확인(20회)한 다음 그 내용을 김씨에게 전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씨는 오씨로부터 박삼구 회장의 동향을 넘겨받는 대가로 28회에 걸쳐 식사와 술대접을 했다. 가격으로 따지면 85만5000원 상당이라고 검찰은 말했다. 접대는 서울 한남동의 한 백반집과 곰탕집, 양·대창 구이집 등 세 곳에서만 이뤄졌다.
애초 검찰은 김씨가 박찬구 회장의 지시를 받아 오씨에게 박삼구 회장의 일정을 알려달라고 청탁을 했을 것으로 보고,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 않다면 운전기사가 이렇게 수십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정보를 빼내려 했을 리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씨는 완강하게 버텼다고 한다. 그는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박삼구 회장의 일정을 알고 싶었다”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 박찬구 회장의 지시나 묵인은 없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계속 추궁해도 김씨는 흔들리지 않았다”며 “보통 운전기사의 입에 무너진 유력인사들은 운전기사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경우가 많은데, 박 회장은 운전기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1979년 금호에 입사한 김씨는 주로 화물차를 몰다 1989년부터 금호그룹의 임원 차량을 운전했다고 한다. 박찬구 회장의 차를 몬 건 15년 전부터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