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한창일 때인데 왜 맛이 없는 걸까.' 요즘 소비자들 사이에서 봄이 제철인 딸기 맛이 예전만 못하다는 반응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경기도 평촌에 사는 주부 임모(55)씨도 마찬가지다. 임씨는 "매년 이맘때면 시장에 나오는 딸기가 참 맛있었는데 왠지 최근 몇년 동안 딸기 맛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 같다"며 "마트에 가도 다른 과일에 손이 자꾸 가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소비자들의 입맛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농촌진흥청 관계자는 "실제로 당도 테스트를 해보면 요즘 나오는 봄 딸기는 확실히 예전에 비해 당도가 떨어진다"며 "대신 매년 12월에서 이듬해 2월에 출하되는 겨울 딸기가 훨씬 당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과일의 당도는 브릭스(Brix·1브릭스=100g에 당 1g 포함)라는 단위로 표시되는데 겨울 딸기는 12.5브릭스, 봄 딸기는 10브릭스 정도인 것으로 측정된다는 것이다.

봄철 과일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딸기가 '계절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제철이라는 봄을 제치고 계절을 하나 앞당겨 겨울철 제왕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롯데마트 과일 판매 순위에서 딸기는 2010~2014년 5년 연속 겨울에 가장 많이 팔린 과일 자리에 등극했다. 딸기가 겨울 과일로 옮겨가면서 여름 과일인 참외·수박이 봄 과일로 연쇄적인 자리 옮기기를 하고 있다. 국내 과일 세계에 계절 파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딸기 혁명 일으킨 '설향(雪香)'

봄 딸기 맛이 없어진 가장 큰 이유는 추위에 강한 신품종이 개발·보급되면서 전년도 초겨울부터 수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보통 딸기는 전년도 늦가을부터 다음해 초여름까지 8개월 정도 재배를 하는데, 그 중간에 4~5번 정도 열매를 수확한다. 김현숙 논산딸기시험장 농업연구사는 "딸기라는 과일은 가장 처음 맺는 열매가 가장 맛있고 그 이후로는 딸기 줄기의 수세(樹勢)가 약해져 당도와 영양이 점점 떨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국내 과일 시장에선 봄 딸기가 전성기를 달렸다. 2000년 가락시장에 반입된 딸기 중 70.7%가 봄철(3~5월)에 집중됐다. 당시 국내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던 딸기 품종은 아키히메(章姬)와 레드펄 등 일본산 품종이었다. 하지만 이 딸기 품종들은 추위에 약하거나 겨울철 병충해에 약하고 과육이 무르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김태일 논산딸기시험장장은 "아키히메는 추위는 견디지만 병충해에 약해 생산량이 적었고, 레드펄은 겨울엔 성장이 더뎌 시기가 늦은 2월 이후에야 생산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산 신품종을 앞당기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에 한 해 30억~60억원의 딸기 품종 사용료까지 요구한 것이다. 김태일 시험장장은 "1990년대 중반부터 국산 신품종을 개발하고는 있었지만, 일본 측의 갑작스런 요구는 신품종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논산딸기시험장을 중심으로 한 국내 연구진은 결국 10여년 만인 2005년 추위에 강한 '설향(雪香)'이라는 순수 국산 딸기 품종 개발에 성공했다. 김승유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딸기연구실 총괄연구관은 "설향은 추위와 병충해에 모두 강해 초겨울부터 수확이 가능한 품종"이라며 "딸기가 겨울 과일 시장을 제패하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김 연구관은 "딸기는 기본적으로 섭씨 5~15도에서 잘 자라는 저온성(低溫性) 작물로, 온도가 낮고 햇빛이 적은 겨울엔 열매가 익는 데 60일 정도 걸린다"며 "숙성 기간이 길수록 당도와 양분 축적이 많아지기 때문에 겨울 딸기의 맛과 영양이 봄 딸기보다 훨씬 좋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설향의 등장은 '딸기=봄철 과일'이라는 등식을 순식간에 깨뜨렸다. 설향의 국내 점유율이 올라갈수록 겨울철 딸기 생산량도 늘어났다. 일본산 딸기 점유율이 90% 이상이었던 2000년 서울 가락시장에 반입된 겨울(1~2월, 11~12월) 딸기는 연간 반입량의 29%에 불과했다. 하지만 설향의 딸기 점유율이 전체의 78.4%까지 올라간 지난해엔 43%까지 치솟았다.

설향이 대성공을 거두자 상대적으로 봄 딸기 생산 비중은 낮아졌다. 지난해 봄철 반입량은 불과 56.7%였다. 맛있는 겨울 딸기 설향이 과일 시장의 판도를 바꾼 것이다. 당도가 높아진 겨울 딸기의 등장은 해외 수출로 이어졌다. 2002년 설향에 앞서 개발된 '매향(梅香)'이 일본 시장 문을 열었다. 국산 딸기 품종이 해외 수출에 나선 건 처음이었다. 김현숙 연구사는 "설향보다 과육이 더 단단한 매향은 홍콩·싱가포르 등 19개국으로 수출하는데 현지 반응이 매우 좋다"고 말했다.

봄으로 뒷걸음치는 참외·수박

이렇게 딸기가 주 활동 무대를 봄에서 겨울로 옮기자 그 빈자리를 참외와 수박이 채우는 '도미노 현상'이 나타났다. 2010년 봄철(3~5월)에 서울 가락시장에 반입된 참외는 7041t으로 한 해 참외 반입량의 30%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엔 1만2705t(44.2%)로 15%포인트 가까이 늘었다. 같은 기간 수박 반입량도 9564t(14.9%)에서 1만4678t(20.6%)으로 늘어났다.

또 2010년 4월엔 봄 과일인 딸기가 롯데마트 과일 매출 1위였지만 2011~2014년엔 토마토·참외가 1~2위를 기록하더니 올해 들어 참외가 아예 4월의 '과일 왕좌'를 차지해버렸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작년 참외 판매량의 72%가 3~5월 봄에 집중됐다"며 "이제 참외를 여름 과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해졌다"고 밝혔다.

문지혜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박과(瓠果) 채소연구관은 "참외·수박은 고온성 작물이라 여름에 잘 자란다고 생각해왔지만, 품종이 지속적으로 개량되고 비닐하우스 재배 기술이 발달하면서 봄에도 맛 좋은 열매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박이나 호박의 뿌리를 접붙여 만든 새로운 수박 품종은 저온에서 잘 자라면서도 맛도 좋아진다는 것이다. 또 병충해를 예방하고 효율적인 생육 관리를 할 수 있는 재배 기술이 발달하면서 봄 참외·수박의 당도는 해가 갈수록 향상되는 추세다.

문지혜 연구관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소비자들은 '과일은 제철에 먹어야 맛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먹어보니 제철보다 일찍 나온 과일도 맛과 영양 면에서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수요가 커지고 여기에 시장이 반응하면서 공급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시기를 앞당겨 비싸게 먹는다

1986년 서울시가 발간한 '농수산물 가격 동향'에 따르면 각 계절에서 가락시장 반입량 1위를 기록한 과일은 감귤(겨울)·사과(봄·가을)·바나나(여름)·복숭아(여름) 등이었다. 올해 과일 시장을 석권한 딸기와 참외의 당시 유통량은 전체 채소량의 각각 1% 미만에 불과했다. 과거엔 쉽게 맛보기 어려운 '귀하신 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비닐하우스 재배가 보편화되면서 이들 과일의 생산량은 늘어났고 맛도 좋아졌다.

수입 과일과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박기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과일과채관측실장은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국민의 과일 입맛도 다각화됐다. 각국과의 FTA 체결로 다양한 과일이 수입되면서 대표적 국산 과일인 딸기·참외·수박 등도 경쟁력을 갖출 필요성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 2000년대 이후 품종을 개량하고 재배 기술을 발달시켜 생산자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출하 시기를 앞당기는 추세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수입 과일과 국산 과일이 서로 출하시기를 달리해 판매 극대화를 이끌어내려는 공급 측 움직임도 나타났다. 김현숙 연구사는 "최근 딸기 출하 시기가 11월까지 앞당겨진 이유 중 하나는 2월부터 수입이 본격화되는 오렌지와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다"고 말했다. 그는 "2월부터 미국 등지로부터 대량 수입되는 오렌지와 정면으로 맞붙기보다 수요가 크지만 공급이 적어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게 형성되는 11~1월에 딸기를 출하해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박기환 실장은 "영화 시장에서 블록버스터 외국 영화를 피해 국내 영화가 개봉하는 흐름과 비슷한 경향이 과일 시장에서 관찰되고 있다"고 말했다.

과채 농가 역시 "이익을 많이 남기려면 출하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한다. 딸기생산자대표조직 관계자는 "겨울에도 맛 좋은 딸기를 먹고 싶다는 수요는 많지만 공급이 적어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 출하 시기를 앞당기려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일들의 계절 앞당기기가 소비자들에겐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제철에 비해 비싼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11월에 출하된 딸기 가격은 2만5454원(2㎏)이었지만 가장 많은 딸기가 시장에 나온 3월엔 1만893원으로 떨어졌다. 제철보다 2배 넘는 가격을 줘야 겨울에 딸기를 먹을 수 있었다. 4월 참외 가격은 10㎏당 5만3642원으로 연중 가장 비쌌다. 7월 참외는 1만2168원이었다. 4월 수박 역시 1㎏에 2407원으로 가장 비쌌는데 8월 수박은 641원이었다.

과일 출하 시기가 계속 앞당겨지는 현상에는 유통업체도 한몫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대형마트에선 과일 소비자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국산·수입 과일 비율을 조절하면서, 한편으론 국산 과일의 판매 흐름을 짧게 끊어가려는 경향을 보인다"며 "그래야 마트의 이익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신성철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수박·참외·딸기관측연구원은 "제철이 없어지는 듯한 모습은 마케팅이 빚어낸 착시 현상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딸기·참외·수박의 최초 출하 시기가 앞당겨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많은 물량이 시장에 나오는 시기는 전통적인 제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