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시간을 걷다
의 골목
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의 '건축학 개론' 수업 첫 시간이다. 교수는 칠판에 서울 지도를 붙여놓고, 한 명씩 나와 집부터 학교까지 오는 길을 표시해 보라고 한다. 신촌의 한 학교를 중심으로, 지도는 학생들이 표시하는 선으로 조금씩 붉게 변해간다. 승민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누군가가 그어 놓은 선 위에 겹쳐서 자신의 길을 표시한다. 성신여대 앞을 거쳐 혜화동을 지나, 창경궁과 경복궁과 독립문 근처를 경유해 도착하는 학교.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고, 그들의 첫사랑과 15년 후의 만남은 지도 위에 겹쳐진 바로 그 선에서 시작한다.
이라는 영화를 하나의 건축물이라고 본다면, 이것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세월'과 '집' 그리고 '골목'이다. 사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첫사랑에 대한 기억'과 '오랜만의 재회'라는 소재는 발에 차일 정도로, 길가의 잡초만큼이나 흔한 '모든 사람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특별해질 수 있었던 건, 시간과 공간의 결을 섬세하게 포착해낸 카메라 덕분이다. 이른바 '시간의 공간화'인 셈인데, 그 중심엔 '집'이라는 모티프와 '골목'이라는 장소가 있다. 여기서 '길'이 아니라 굳이 '골목'인 것은, '길'이 어디론가 향해 나아가는 방랑자의 공간이라면 '골목'은 옛 일을 떠올리며 다시 찾는 추억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길'이 미래라면, '골목'은 과거다.
199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하는 을 만들 때 가장 큰 고민은 아마도 그 시절의 느낌을 공간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차라리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라면 지방에서 촬영하거나, 그보다도 이전 시기라면 야외 세트를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는 애매하다. 과거이지만 옛날이라고 하기엔 조금 그런, 현재와 향수가 뒤엉킨 듯한 시대다. 그런 고민 속에서 이 영화가 선택한 첫 번째 '1990년대적 공간'은 바로 정릉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용주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연출부 출신인데, 과거 봉 감독이 한영애의 '외로운 가로등'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 장소 헌팅을 하면서 정릉을 처음 만났고, 에서 승민과 서연이 사는 동네로 선택했다.
2000년 이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정릉을 둘러싸고 있지만,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지역이 있다면 정릉 공원 입구를 마주보고 왼쪽에 자리한 '교수단지'(敎授團地) 지역이다. 1970년대 서울대학교와 인접한 지역으로 조성된 곳으로, 이곳에서 승민과 서연의 만남은 비로소 시작된다. '건축학 개론' 수업의 첫 과제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 승민의 과제는 정릉에서 시작하는데, 커다란 느티나무를 앵글에 담던 승민의 프레임 안으로 서연이 들어온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인연으로 과제를 함께 하게 된 그들은 정릉 부근의 골목들을 거닐며 사진을 찍는다.
아파트가 주거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이젠 집도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가는 시대에, 정릉의 비탈진 골목 양 옆엔 온통 담쟁이 넝쿨로 벽을 뒤덮은 빌라와 넓은 마당의 양옥집과 무슨 ‘맨숀’이라는 낡은 팻말이 붙은 주택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어우러져 있다. 200~300년 후까지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사적’까지는 아니어도 지방 문화재 정도로는 지정되지 않을까 싶은 이 건물들의 군집은, 마치 서양식 건물들로 이뤄진 한옥 같다. 시간의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고상한 노부인처럼 늙어간 느낌이랄까?
이러한 고색 창연한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 이외에 이곳을 걸을 만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골목들이 주는 여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골목엔 골목만 있지 않다. 물론 사람들이 오가는 그 ‘기능’이 우선이겠지만, 커다란 고목과 구석마다 일궈진 텃밭과 조용히 지저귀는 새소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게 한다. 계단 난간에 널린 이불은 오랜만에 햇볕을 쪼이고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 긴 세월 동안 쌓여 골목의 전체적인 톤을 이루고 있는 이끼는 ‘추억도 저렇게 쌓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지역의 골목들은 드라마틱하다. 45도를 훨씬 넘을 것 같은 비탈진 길은 S 모양으로 휘어 있어 자동차로 오르내릴 땐 도로반사경 없이는 도저히 운전할 수 없을 것 같은 곳. 집과 집 사이에 있는 골목은, 깎아지른 듯 마치 낭떠러지 같기도 하며, 어떤 골목은 어른 두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면 지나갈 수 없을 것처럼 좁다. 하지만 한 켠에선 평상에 앉은 두 노인이 장기를 두고 있는 그곳은, 세월의 풍상을 피하지 않고 오롯이 견딘 공간처럼 느껴진다.
1960~70년대 서울의 난개발의 참상이 남아 있는, 재개발의 손길이 아직 닿지 않은 곳. 영화는 그곳을,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승민이 납뜩이에게 그 떨림을 털어놓고 충고를 듣기도 하고 결국은 위로 받는 장소로 보여준다. 내리막길이 끝나는 무렵에 눈에 띄는 작은 계단들은 깊은 밤 주저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벤치 같은 공간. 이곳에서 승민은 납뜩이의 품에 안겨 사랑의 고통에 펑펑 운다. 요즘도 이런 골목의 정서를 느낄 수 있을까? 하지만 1990년대엔 종종 목격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골목만으로는 서연과 승민의 첫사랑을 모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을 마련한다. 우연히 발견한, 낡은 한옥. 첫눈이 오는 날 그곳에서 만나자던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지만, 세월이 흐른 후 승민(엄태웅)을 찾아온 서연(한가인)은 ‘집의 약속’을 지켜달라고 하고, 그렇게 그들은 제주도 바닷가에 집을 짓게 된다. 영화 속 빈 집은 종로구 누하동의 좁은 골목 한구석에 있는데, 촬영이 끝나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비어 있다. 혹시 찾아간다면… 굳게 잠긴 자물쇠 때문에 집 안을 볼 순 없을 듯하다.
‘건축학 개론’ 첫 수업에서 교수는 아이들에게 묻는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영화 은 이렇게 묻는 듯하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걷고 있는 골목이 훗날 어떤 추억이 될지 가늠할 수 있을까?” 세월이 만든 두 사람의 추억. 그것을 환기시키는 골목. 그리고 그들의 인연을 이어주는 집이라는 매개체. 은 시간과 공간으로 빈틈없이 쌓아 올린, 정교하면서도 울림 있는 멜로드라마다.
사족 하나. 혹시 정릉이 누구 묘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다면, 볕 좋은 주말에 그곳을 한 번 둘러보길. 영화 개봉 이후 입장객이 30퍼센트 정도 늘어났다고 하는데, 정릉으로 들어서면 이젠 ‘이제훈 나무’가 된 165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반겨 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난다면, 정릉 바로 옆 교수단지 골목들도 한 번 느껴 보길. 도시에서 느끼기 쉽지 않은, 한적한 안식이 그곳에 있다.
글_영화평론가 김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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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VON 2012년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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