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 지배 계속 원했던 英, 中과 '독립' 조항 놓고 대립
美 중재로 천신만고 끝에 "적절한 절차로 독립" 결의
이집트 카이로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15㎞ 떨어진 기자(Giza) 피라미드 지구. 기원전 2500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3개의 대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있는 이 유서깊은 지역에 1886년 건립된 고급 호텔이 있다. 메나 하우스 호텔. 고대 이집트 왕국을 창건한 파라오의 이름에서 따온 이 호텔에선 손을 뻗으면 닿을 듯 피라미드가 가깝게 보인다. 70여년 전 한국의 독립안(案)이 국제 사회에서 처음으로 공식 논의된 곳이다.
연합국이 2차 대전의 승기를 잡은 1943년 11월, 미국과 영국, 중국 등 3개국 정상이 속속 메나 하우스 호텔에 들어섰다. 그달 22일부터 26일까지 군사 전략과 전후(戰後) 질서를 함께 논의했던 카이로 회담의 본부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호텔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묵었던 방에 '처칠 스위트(Churchill Suite)'라는 문패를 붙여놓고 있다. 이 방의 하루 숙박비는 1500달러(170만원)다.
당시 회담 진행을 맡았던 영국은 호텔 인근 비행기지에 보병 1개 여단 이상의 병력과 대공포 500여대를 배치하고 경계에 나섰다. '주최국'을 자임한 영국은 처칠 총리를 포함해 100여명이 참가했다. 미국 측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포함해 60여명이었다. 중국도 장제스 국방최고위원장 등 28명이 참가했다. 이들 3개국 참가자는 188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처칠은 자신의 회고록에 "500명이 참가했다"고 호기롭게 적었다. 중국으로서는 미·영·소와 나란히 '세계 4대 강국'으로 국제 사회에 등장하는 무대였다.
한국의 독립안이 카이로 회담에서 처음 논의된 시각은 1943년 11월 23일 오후 8시. 장제스가 루스벨트와의 만찬 석상에서 '한국 독립' 안건을 꺼냈다. 일본이 차지한 만주와 대만·팽호도의 중국 반환, 일본이 강점한 태평양 도서(島嶼) 지배권 박탈과 함께 주요 의제로 잡은 것이었다. 이날 회동은 밤 11시까지 3시간가량 계속됐다. 장제스는 24일자 일기에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해 나는 루씨(루스벨트)에게 나의 주장에 찬동하고 도와달라고 요구했다"고 적었다.
만찬에 동석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다음 날인 24일 오후 카이로 회담의 선언 초안을 작성했다. 그는 대통령 빌라 일광욕실에서 별도의 원고나 메모 없이 수행원에게 초안 내용을 구술(口述)하며 타이핑하도록 했다. 홉킨스는 1931년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루스벨트가 긴급구제국장으로 발탁했던 최측근이었다. '일본 몰락 이후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될 것임을 결의한다'는 문구도 홉킨스 초안에서 처음 등장했다.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기에'라는 구절은 루스벨트와 처칠의 수정을 거쳐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로 확정됐다.
미·영·중 3개국은 전후 질서 수립을 둘러싸고 시종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특히 영국과 중국은 '한국 독립' 승인을 놓고 정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인도·버마 등에 대한 식민 지배 유지를 바라던 영국은 한국 독립 조항을 명시하는 걸 반기지 않았다. 캐도건 영국 외무차관은 25일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될 것"이라는 구절을 "일본 통치에서 이탈시킬 것"이라고 수정하려고 했다. 사실상 '독립'이라는 표현을 빼려는 시도가 중국 반대로 무산되자, 영국은 한국 관련 조항 전체를 삭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하지만 미국이 중재에 나서고 다음 날 처칠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될 것을 결의한다"는 수정안을 내놓으면서 양국 갈등은 잦아들었다.
중국과 미국도 상대방에 대해 불신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23일 만찬에서 장제스가 만주·대만의 중국 반환과 한국 독립 등의 주장을 쏟아내자, 미국은 중국의 영토 확장 의도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루스벨트는 다음 날 영국과의 합동 참모회의 석상에서 "중국이 만주와 한국의 재점령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주목한 미국은 중국이나 소련이 일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다자간(多者間) 합의에 의한 국제 공동 관리'를 한반도 정책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3개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한국 독립안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카이로 선언에 포함됐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은 카이로 선언 발표 직후인 1일 "나는 3000만 동포를 대표하여 3영수에게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일본이 무조건 투항할 때까지 동맹국의 승리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최후까지 공동 분투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하지만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으로 곧바로 '자주 독립국가 건설'을 보장하지는 않겠다는 국제 사회의 냉혹한 계산이 '적절한 절차를 거쳐'라는 짧은 문구에 함축되어 있었다. 이 비극적 불씨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발표하면서 반탁(反託)과 찬탁의 거센 불길로 번졌다. 카이로 회담은 한국 독립을 명시한 최초의 국제 회의라는 역사적 의의와 함께, 복잡한 국제 정세로 신생(新生) 대한민국의 운명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소련 빠진 카이로 회담… 스탈린의 신변 걱정 탓?
미·영·중(美英中) 정상이 참가한 카이로 회담(1943년 11월 22~26일)과 미·영·소(美英蘇)의 테헤란 회담(11월 28일~12월 1일)은 미·영 양국 정상의 이동 시간을 감안하면 사실상 연달아 열렸던 '쌍둥이 회의'다. 왜 두 회의는 한 군데서 열리지 않고, 불편하게 두 장소에서 나뉘어 열린 것일까.
우선 소련은 1941년 4월 일본과 맺은 중립 조약 때문에 대일(對日) 전선에서 다른 연합국과 보조를 맞추기 힘들었다는 분석이 있다. 소련은 일본 패망 이후 전후 처리 구상을 주로 논의했던 카이로 회담에 참가하지 않는 대신, 테헤란 회담을 통해 유럽 전선에 대한 공동보조를 밝히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28일 테헤란 회담에서 "독일이 최종적으로 격파되면 시베리아에 필요한 지원군을 보낼 수 있고, 우리는 공동 전선에서 일본을 칠 수 있을 것"이라며 대일 참전을 약속했다.
신변 안전에 민감한 스탈린이 카이로보다 소련에 인접한 이란의 테헤란을 골랐다는 해석도 설득력있다. 미 국무부 외교 문서에 따르면, 1943년 9월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에게 이집트를 회담 장소로 고려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스탈린은 끝내 테헤란을 고집했다.
만주를 비롯한 동북아 지역의 전후 주도권을 놓고 중·소(中蘇) 양국이 경쟁 관계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루스벨트는 카이로 회담을 한 달 앞둔 1943년 10월 장제스와 사전 협의하려고 미국 대통령 특사 패트릭 헐리 준장을 중국 충칭(重慶)에 파견했다. 당시 소련의 회담 의사를 묻는 헐리의 말에 장제스는 "시기 미숙"이라고 답했다. 중·소의 '불편한 관계'는 1945년 종전(終戰) 이후 국공(國共) 내전이 다시 불거지면서 현실이 되고 만다. 결국 루스벨트는 4국 정상회담 개최 계획을 수정해, 미·영·중 3국 회담과 미·영·소 3국 회담으로 양분했다. 두 회담 일정은 11월 8일 미국의 최종 통보로 확정됐다.
공동 기획: 대한민국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