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2만명, 한달 관객 20만명... 오스트리아 브레겐츠의 저력

호숫가 수상 무대에서 올리는 야외 오페라는 인구 2만의 소도시 브레겐츠가 여름 한 달간 오페라 관객만 20만명 넘게 끌어들이는 원동력이다. 축제 기간에는 브레겐츠는 물론 도른비른, 독일 린다우 등 인근 도시 호텔까지 동날 만큼 관광객이 몰려든다. 브레겐츠에서 6㎞ 떨어진 작은 마을 로하우에 막차 객실 하나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알프스산맥을 배경 삼아 콘스탄스 호수 위 수상 무대에서 열리는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이 야외 오페라 1편을 보기 위해 인구 2만 소도시 브레겐츠에 20만명 가까운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김기철 기자)

알프스 산맥 아래 호수를 무대로 삼은 브레겐츠 수상 오페라의 매력은 강렬하면서도 예술적인 시각 효과. 세트 건설 기간만 1년에 700만유로(약 95억원)를 들였다. 2m 높이 토용 무사들과 흙빛 만리장성은 붉고 푸른 조명 아래 당당한 위세를 뽐냈다. 작년 ‘마술피리’ 여주인공 파미나처럼 투란도트 공주는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배를 타고 등장했다. 반대쪽에선 페르시아 왕자가 역시 배를 타고 무대 앞으로 나온다. 페르시아 왕자는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수수께끼 풀이에 도전하지만 실패한다. 병사들에게 붙잡혀간 페르시아 왕자가 10m 넘는 성벽에서 목이 매달려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은 섬뜩할 만큼 실감났다.

공연 중반부터 호수 안을 헤엄치던 오리 일가족이 꽥꽥 소리를 지르며 칼라프 왕자와 투란도트 공주의 이중창에 끼어들었다. 관객들은 느닷없는 ‘배우’의 출연에 웃음을 터뜨렸다. ‘오리 배우’는 불쑥불쑥 오페라에 끼어들었지만, 그때마다 관객들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자연과 어우러진 브레겐츠 수상 무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브레겐츠 페스티벌엔 테너 김경호가 대신 ‘핑, 팡, 퐁’ 삼총사 중 퐁으로 나서 반가움을 더했다. 김경호는 린츠 오페라 극장서 ‘마술피리’ 주역 타미노 왕자로 출연한 경력을 인정받았다.

첨단 기술과 예술의 만남

브레겐츠는 성악가들이 핀 마이크를 뺨에 붙이고, 스피커를 대놓고 쓴다. 객석 삼면도 수백개가 넘는 스피커가 감싸고 있다. 야외 수상 무대를 안내하던 브레겐츠 페스티벌 직원 리사 클루는 “무대 위 만리장성에만 대형 스피커 59대가 설치돼 있다”고 했다. 엘리자베스 소보트카 브레겐츠 페스티벌 예술감독은 “스피커 없이 수상 오페라를 제대로 즐기긴 어렵다. 자연스러운 음향을 가장 잘 살린 곳”이라고 했다. 2000년 전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특별한 음향 장치 없이 공연하는 베로나 야외 오페라와는 다른 점이다.

브레겐츠 페스티벌 측은 2007년 오스트리아 빈의 대학 음향 연구소와 공동으로 ‘브레겐츠 야외 음향’이라는 독자 시스템을 개발했다. 객석에서 들어보니 고급 오디오를 갖춘 방 안에서 듣는 것처럼 성악가들의 노래와 움직임이 생생하게 들렸다. 작년에 올린 ‘마술피리’ 때보다 소리가 더 자연스럽게 들렸다. 음향 기기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첨단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관극 효과를 최대화한 것이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예술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빈 심포니다. 빈 심포니는 호숫가 야외 무대가 아니라, 객석 뒤쪽과 맞닿은 1656석짜리 콘서트홀에서 연주한다. 오페라 공연 내내 무대 좌우에 설치한 대형 화면과 스피커로 라이브 연주하는 이탈리아 지휘자 파올로 카리냐니(54)와 빈 심포니 단원들의 모습이 야외로 중계됐다. 야외 공연장과 100~200m 떨어진 실내에서 연주하지만, 시차 없이 성악가들과 정확하게 호흡을 맞추는 게 신기할 정도다. 프라하 필하모닉 합창단과 브레겐츠 페스티벌 합창단도 콘서트홀 안에서 연주했다.

진나라 토용을 모델로 삼은 중국 무사들. ‘투란도트’ 무대엔 모두 205명의 무사가 등장한다. (김기철 기자)

세계대전 참화 딛고 출범한 페스티벌

브레겐츠가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가 맞대고 있는 콘스탄스 호숫가에서 야외 오페라를 시작한 것은 1946년이다. 세계대전의 참화를 딛고 호수 위에 배를 띄워 야외 오페라를 올린 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눈 덮인 알프스 자락 푸른 호수는 그 자체가 환상적인 무대가 됐다. 1985년부터 오페라 1편씩, 2년간 여름 시즌에 올리는 것을 정례화하면서 ‘나부코’(1993~1994년)가 30만명, ‘피델리오’(1995~1996년)가 31만8000명을 불러모았고, ‘일 트로바트레’(2005~2006년)가 30만명을 넘겼다.

푸치니 ‘토스카’(2007~2008년)는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이름을 세계 곳곳에 알린 계기가 됐다. 007 영화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악당을 만나 대결을 펼친 곳이 바로 브레겐츠 페스티벌 ‘토스카’ 무대였기 때문이다. 역대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은 작년까지 페스티벌 예술감독이던 데이비드 파운트니 영국 웰시 오페라 예술감독이 연출한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가 세웠다. 2013년과 2014년 2년간 40만6000명이 ‘마술피리’를 봤다. 일반인과 애호가들을 모두 끌어들일 만큼, 예술적 수준을 유지한 게 성공 비결이다. 종전 기록은 2003년과 2004년 40만5314명이 본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였다.

‘투란도트’ 공연 직후 출연진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김기철 기자)

올해 브레겐츠 페스티벌은 실내 페스티벌 극장에서 자크 오펜바흐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를 올리고 빈 심포니 콘서트를 여는 등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꾸몄다. 오페라 스튜디오와 워크숍을 통해선 성악가들을 길러내고, 창작 역량을 끌어올리는 기초 작업까지 소홀히 하지 않는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은 오페라가 첨단 과학기술을 만나 예술적 수준을 높이면 문화 상품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성공 사례다.

브레겐츠 예술감독 소보트카
 "마이크 아무리 좋아도 성악가 실력이 중요"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특색은 호숫가에서 열린다는 점이다. 알프스 산맥 아래 콘스탄스 호수는 오페라를 접하기에 가장 멋있는 곳이다. 물론 빈 국립오페라에서 올리는 (정통) 오페라와는 다르다. 오페라에 새로운 관객을 계속 끌어들이는 게 목표다. '와우, 오페라는 멋있는걸' 하며 다시 극장을 찾을 수 있도록."

브레겐츠 페스티벌은 올 초 새 사령탑을 맞았다. 2004년부터 페스티벌을 이끌던 연출가 데이비드 파운트니 대신 예술경영 전문가인 엘리자베스 소보트카(50)를 예술감독으로 영입했다. 소보트카는 베를린 국립오페라 오페라 디렉터와 린츠 극장장을 거쳤다. 그는 "3년 전부터 지휘자 파올로 카리냐니와 연출가 마르코 아르투로 마렐리와 함께 브레겐츠 페스티벌에 어떤 작품을 올릴까 의논하다 '투란도트'로 정했다"고 했다. "음악이 강렬하고 화려하잖아요. 스토리도 흥미진진하고. 무엇보다 가장 유명한 아리아 '네순 도르마'(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있으니까요. 의견이 일치했어요."

소보트카 감독은 "야외 오페라는 무엇보다 강렬한 이미지의 무대 세트가 필요하다. 구상부터 따지면 3년이 걸렸고, 세트를 세우는 데만 1년이 걸렸다. 전작인 '마술피리' 세트를 다 해체하고, 기초부터 새로 만들었다"고 했다. 중국을 배경으로 한 '투란도트'를 고른 이유가 중국 관광객 '유커'(遊客)를 노린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많이 왔으면 좋겠는데…"라며 웃었다.

브레겐츠 오페라에서 성악가들이 마이크를 사용하는 데 대한 거부감도 있다. 소보트카 감독은 "목소리를 바꿀 순 없다. 실력 있는 성악가가 아니면 아무리 마이크를 써도 좋은 소리가 안 나온다. 소리가 자연스럽게 들릴 만큼만 키운다"고 했다. "브레겐츠의 음향 시스템은 매우 정교하다. 청중에게 가장 정확한 소리가 들리도록 설계돼있다. 야외에선 이런 음향 시스템이 없으면 제대로 음악을 들을 수 없다."

다음 작품을 물었다. "푸치니 '카르멘'. 이미 시작했다. 카스퍼 홀튼(영국 로열오페라 오페라 디렉터)이 연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