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농은 썰물과 같았다. 1966년 27만7506명이던 전북 정읍(井邑)시 인구는 2000년대 초 그 절반으로 줄었고, 올해 11만6600여명이 됐다. 반세기 전 정읍은 군(郡)이었지만 서울·부산을 포함한 전국 모든 시·군 중 여덟째 많은 인구가 깃들어 살고 있었다.
많은 아들딸을 대도시와 산업화 현장에 내보내고 자신은 왜소해진 정읍시가 지금 저력을 드러내고 있다. 전북 서남권 교통 물류 허브로서 호남선 KTX 개통과 함께 과학산업도시·휴양연수도시를 향한 행보에 속도를 냈다. 지난 7월 연구개발특구로 지정된 내장산 옆 신정동 신도시가 이를 보여준다.
◇국립공원에 접한 연구개발특구
27일 국립공원 내장산 자락에서 내려다본 정읍시 외곽 신정동 일원. 한적했던 시골이 10년 사이 쾌적한 캠퍼스 타운으로 변모하고 있다. 새 건물 20여동 사이로 반듯한 운동장과 정원들이 배치됐다. 신축 중인 건물도 여럿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안전성평가연구소의 분원 및 부속 시설들이다. 원자력연구원은 이곳에 첨단방사선연구소를 세워 신소재·환경·식품·의료 등 원자력 비발전(非發電) 분야 연구 시설들을 집적하고 있다. 방사선을 쪼인 우주 식품과 면역력 증강제, 비(飛)거리를 늘린 골프공, 새로 육종한 식량·원예작물 등 수십 가지 연구·개발 성과를 벌써 내놓고 있다.
생명공학연구원 분원은 '바이오소재R&D허브센터'에 이어 연내 '미생물가치평가센터'를 개관한다. 안전성평가연구소는 설치(齧齒)·영장(靈長)류를 이용, 먼지·연기 등 호흡 물질과 화합물·식품·신약 등의 독성 및 안전성을 평가·연구하는 곳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적격 인증까지 받았다.
이 국책연구소들의 신기술을 이용해 돈 벌 기업을 모으는 게 정읍시의 과제다. 시는 연구단지 동편 약 89만㎡를 첨단과학산업단지로 조성했다. 지난 4월 호남선 KTX가 개통되고 석 달 뒤 이 일대 154만㎡가 연구개발특구로 지정되면서 기업 상담이 빈번해졌다. 연구소 기업, 첨단기술 기업 창업을 집중 지원하며, 일반 기업에도 세금 감면 등 여러 혜택을 준다. 땅값부터 3.3㎡당 27만원 선으로 저렴하다. 전북대는 산단 안에 산학협력지원센터를 짓고 있고, 시는 산단 99만㎡를 추가 조성키로 했다.
◇연수도시 첫 삽… 내장산엔 5성호텔
KTX는 서울~정읍 통행 시간을 2시간 반에서 78분으로 줄이면서 지난 4~7월 이용객을 33% 늘렸다. 메르스 사태 속에서도 하루 평균 이용객이 1308명에 이르면서 정읍역 매표 수입이 5000만원을 넘긴 날들도 있다. 시가 KTX 개통을 고대하며 한국관광공사와 손잡고 조성한 게 내장산 휴양연수도시다.
휴양연수도시 메인 무대는 용산 저수지 상류 '내장산 리조트'다. 지난달 말 18홀의 골프장 부지가 매각되고 이달 중순 KT&G가 객실 66실의 연수원을 착공하면서 면모를 가시화했다. 리조트 내 여관 및 펜션 부지도 7곳이 분양됐다. 한국전기안전공사와 KAIST는 리조트 곁에 연수원을 짓기 위해 시와 협의 중이다.
내장산의 수려한 경관 속에 4계절 국민을 불러 모으는 게 시 숙원이었다. 내장산 입구엔 워터파크에 이어 이달 국민여가캠핑장이 들어섰고 5성급 호텔도 전북에서 두 번째로 유치됐다. 내장산과 20분 거리의 황토현 전적지엔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이 국가 후원으로 들어선다. 내장산 동쪽으로 태산(태인-칠보) 선비문화권이 관광지로 부상했고, 옥정호 구절초 축제에는 50만 인파가 몰린다.
신정동은 백제 가요 정읍사(井邑詞)의 고향, 옛 정촌현이다. 내장산은 임진왜란 때 태인현 선비 안의·손홍록이 전주사고(史庫)의 조선왕조실록을 옮겨와 조선 전기 역사를 지켜낸 곳이기도 하다. 시는 정촌현 마을에 정읍사 여인을 테마로 한 '설화 속 정원'과 백제 저잣거리 등을 들이고, 실록을 숨겼던 내장산 용굴암·은적암·비래암을 관광 자원화하려 한다.
◇서남권 거점 "15만 인구 회복한다"
정읍은 한우 사육 규모가 국내 시·군·구 중 1위인 축산 거점으로, 20년째 가을 소싸움대회도 열린다. 내장산 단풍과 정읍사 여인의 이미지를 조합한 '단풍미인' 브랜드는 한우와 쌀, 포크(돼지고기), 씨 없는 수박 등 우수 농산물에 붙는다. 정읍 농민들은 '수퍼푸드'로 꼽히는 귀리(오트밀) 농사 복원에 나서 전국 최대 산지로 만들었다. 신태인의 30여 농가는 유기농 포도를 대단위(25㏊)로 생산, 가공·판매·체험·관광 기지를 구축했다. '농생명 융복합'은 정읍 연구개발특구의 과제이기도 하다. 김생기 정읍시장은 "특구와 휴양연수도시 일원에만 1만명 이상 상주하게 된다. 인구 15만명 회복은 꿈이 아니다"고 했다.
정읍역은 시뿐 아니라 전북 서남권 고창·부안군의 관문이다. 정읍역을 거점으로 3개 시·군을 도는 서남권 시티투어가 2년 전부터 운영되고 있다. 세 시·군의 난제였던 전북 서남권 추모공원(광역 공설화장시설·정읍 감곡면)도 오는 11월 개장을 앞두면서 정부로부터 '지역통합' 등 우수 사례로 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