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전 4시 서울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앞. 색이 바랜 등산복에 두툼한 안전화를 신은 사람들이 어둠을 뚫고 하나둘 모여들었다. 등에 메고 온 커다란 배낭을 아무렇게나 길가에 던져놓은 사람들은 봉사 단체가 나눠주는 둥굴레차를 한 손에 감아 쥐듯 들고 다른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일부는 얼굴이 익은 사이인 듯 "김형, 오늘은 일이 좀 있겠지?" "또 데마치(일 없는 날을 가리키는 공사판 은어) 맞으면 안 되는데…" 같은 대화를 나눴다. 남구로역 새벽 인력시장(人力市場) 모습이다.
서울 서남부 지역에서 최대 규모 인력시장이 선다는 이곳엔 구직자와 구인자를 연결해주는 인력 사무소 30여 곳이 줄지어 있다. 하루 약 1000명이 노동력을 팔고자 이곳을 찾는다. 나흘 앞으로 다가온 추석 연휴는 인력시장에 나온 구직자들을 조바심 나게 한다. 명절을 쇠려면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는데, 추석을 넘기면 공사 비수기(非需期)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 인력 사무소 관계자는 "명절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공사장 일자리는 별로 늘지 않았는데 일하려는 사람만 평소의 20% 정도 늘어 공(空)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인력시장 경험이 많은 숙련공(熟鍊工)들은 "추석이 지나면 그나마 있는 일도 없어진다"고 입을 모았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의 아파트 공사장에 가기로 돼 있다는 김모(52)씨는 "건설 현장은 추석 전까지가 그나마 낫고, 추석 지나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일거리가 확 준다"며 "체력이 안 돼 매일 나오진 못 했는데 추석밑이라 지난주부턴 무리해서 매일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고층 건물 공사장에 임시 계단 등을 만드는 비계공(飛階工)으로 20년 정도 일했다는 김씨는 "우리 같은 '노가다'에게 명절이 어딨나. 일이 많은 대목과 일감이 없어 쪽박 차는 날뿐"이라고 했다.
막노동을 하기엔 어설퍼 보이는 사람도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25년간 다닌 회사에서 올 초 명예퇴직을 당했다는 한모(55)씨는 흰색 반소매 와이셔츠에 구두를 신고 있었다. 한씨는 "명절 쇨 돈이라도 벌어볼까 해서 나왔다"며 "아내와 자식은 여기 나온 걸 모른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두 번 나와서 한 번은 공쳤고, 한 번은 공사판 잡부로 일당 9만원 받고 일했다고 한다. "오늘 일거리를 구할 확률은 반반"이라며 멋쩍게 웃는 그는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오전 4시 30분 인력 사무소를 찾은 한씨는 오전 6시 30분이 되도록 누구의 부름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갈아입을 작업복과 안전화를 담아온 종이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출근 시간이 한참 남은 오전 5시. 남구로역 삼거리 일대는 '인력'을 실어 나르는 승합차들로 혼잡을 빚었다. 인근 경찰까지 나서 교통 통제를 했다. 작업 현장으로 떠나는 승합차가 문을 닫는 '쾅' 소리에 이어 시동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구직자들의 희비(喜悲)는 엇갈린다. 아직 고용주의 선택을 받지 못한 구직자들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중국의 중추절(26~27일)과 국경절 연휴(10월 1~7일)를 앞둔 중국 동포도 대거 몰려나왔다. 남구로역 5번 출구 인근엔 한국 근로자들이 자리를 잡았고, 왕복 4차로인 '도림로'를 기준으로 맞은편인 구로동 하나은행 지점 건물 앞엔 중국 동포가 몰려 있었다.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왔다는 장모(48)씨는 "중국 집에 선물이라도 보내려면 많이 벌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
넘실거리는 중국 동포 노동 인파를 길 건너에서 바라보던 한국 근로자들은 "쟤네는 왜 이렇게 많아. 일 구하기 더 어렵겠네" 하고 푸념했다. 한국인 인력시장엔 비계공·콘크리트공 같은 숙련 기능공과 특별한 기술이 없는 막일꾼이 섞여 있지만 중국 동포들은 막일꾼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인력시장 관계자는 "막일꾼 시장에선 일당이 한국인보다 1만~2만원 싼 중국 동포들이 경쟁력이 있다"고 했다.
오전 6시 30분쯤 날이 밝아오며 출근길 회사원과 등교하는 학생들이 거리를 오가기 시작할 무렵 '인력시장'은 파장(罷場)했다. 세 명 중 한 명은 일을 구하지 못하고, 집인지 근처 술집인지 알지 못할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림잡아 서른 명은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한 근로자는 "기다리다 보면 8시에도 가까운 현장에서 급하게 불러줄 때가 있다"며 "그제도 어제도 일을 못했다. 오늘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