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 입사 면접을 치르게 됐어요. 면접 때 입을 만한 정장을 사려고 알아보니 한 벌에 최소 20만원은 들겠더라고요. 친구들에게 빌리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아 고민하다 우연히 싼값에 정장을 빌려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고 한달음에 뛰어왔어요."

지난 22일 오후 서울 광진구 화양동 '열린옷장(www.theopencloset.net)' 탈의실에서 만난 김은희(22·대학생)씨는 급하게 면접용 정장을 빌리러 왔다고 했다. 직원은 김씨의 키, 가슴둘레, 엉덩이 둘레 등 치수를 잰 후 검은색 정장 재킷과 치마, 흰 블라우스 한 벌을 가져다줬다.

이날 '열린옷장' 대기실엔 옷을 빌리러 온 사람 10여명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장을 입어야 할 순간은 의외로 많다. 면접, 졸업사진 촬영, 상견례 등이 그런 순간들이다. 하지만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 가야 할 때 '입을 만한 옷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코디 역할까지 지난 24일 ‘열린옷장’ 김소령(가운데) 대표가 정장을 빌리러 온 손님에게 넥타이를 골라주고 있다. 수납함에 정리돼 있는 넥타이들은 모두 기증받은 물품이다.

'열린옷장'은 그런 사람들에게 소액의 대여료를 받고 '옷장'이 되어주는 곳이다. 재킷 1만원, 바지·치마 1만원, 셔츠·블라우스 5000원 등 세탁비 정도만 내면 옷을 빌릴 수 있다. '취업 준비생들에게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가 대여료 책정의 기준이다. 대여 기간은 3박 4일. 하루 늦어질 때마다 대여료의 20%를 연체료로 받는다.

기증받은 정장 돈 받고 빌려준다

김소령(44) 대표가 '열린옷장'의 문을 처음 연 건 2012년 7월. 이후 약 3년 동안 2만5000여명이 열린옷장에서 옷을 빌려 입었다.

옷장 문이 열릴 때마다 다양한 사연이 쌓였다. 여자 친구에게 청혼하기 위해 미국에서 급히 귀국하느라 정장을 챙겨오지 못한 대학생은 열린옷장에서 검은색 양복을 빌려 입고 청혼해 결혼했다.

한 50대 남성은 사고를 당해 2년째 수술과 입원을 반복하던 중 아내와 리마인드 웨딩 촬영을 하기 위해 정장을 빌렸다. 형편이 어려워 딸 결혼식에 입고 갈 정장을 마련할 수 없었던 아버지도 이곳에서 번듯한 양복을 빌려 입고 식장에 갔다.

열린옷장이 보유하고 있는 정장은 모두 1000벌, 셔츠와 넥타이·벨트 등 액세서리까지 합치면 4000점이 넘는다. 대부분 기증받았다. 첫 기증자는 설립자인 김 대표와 공동대표 한만일씨였다. 각자 자신의 옷장에 있던 잘 입지 않는 정장 몇 벌을 꺼냈다. 친구와 선후배들의 옷장에서 잠자던 정장도 받아왔다. 그렇게 10벌 정도가 마련되자 김 대표는 홈페이지를 열고 대여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난 24일 서울 광진구 ‘열린옷장’ 직원이 여자 손님에게 흰색 블라우스를 골라주고 있다. 가게에 정장 수백 벌이 빼곡히 걸려 있다.

SNS를 통해 조금씩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기부가 이어졌다. 어떤 사람은 '중학교 교사 임용시험 면접 때 아버지가 마련해준 첫 정장'이라며 옷 한 벌을 보냈다. '꿈 많던 취업 준비생 시절 학교 선배가 물려준 행운의 넥타이'를 기부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20년 전 그 넥타이를 매고 면접을 봐서 취업에 성공했다고 했다.

그렇게 사연이 쌓이고 옷이 쌓였다. 개그맨 김준현씨는 넉넉한 사이즈의 양복을 보내왔다. 한국도로공사 교통캐스터들은 여성용 정장 여러 벌을 기증했다. NH농협은행과 법무법인 태평양에서도 직원들이 안 입는 정장을 모아 보냈다. 지금까지 1700여명이 입지 않는 옷을 들고 직접 찾아오거나 택배로 보냈다.

열린옷장 페이스북 공지 사항엔 "입사 면접에서 입을 수 있을 만큼 깔끔하고 어두운 색의 정장만 보내 달라"는 '기증 가이드'가 안내돼 있다. 하지만 청바지나 티셔츠 등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직원들은 이런 옷들을 골라 가방 등을 만들거나 옷을 필요로 하는 다른 곳으로 보낸다.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월급 0원'서 시작

'열린옷장'은 우연히 시작됐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김 대표는 직장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중 2011년 사회적기업 연구단체인 희망제작소에서 운영하는 소셜디자이너스쿨을 찾았다. 사회적 기업 대표들이 강연하고 수강생들이 직접 아이디어를 기획하는 3개월짜리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 김 대표가 내놓은 기획안이 바로 열린옷장이었다.

위 사진에 보이는 신발장 속 구두들도 대부분 기증품이다.

김 대표는 "청년 실업, 청년 취업난이 심각하다는 뉴스가 매일 쏟아졌다. 내가 그들을 취업시켜줄 순 없지만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 비싼 옷값이 떠올라 열린옷장을 구상하게 됐다"고 했다. 기획안을 만들면서 설문 조사를 해 보았다. 취업 준비생들은 1년에 평균 2.8회쯤 입는 면접용 정장을 한 벌 평균 35만7000원에 구매하고 있었다.

창업 비용은 한 푼도 안 들었다. 정장뿐 아니라 책상과 의자, 사무실까지 모두 기증을 받아 꾸렸다. 창업 지원을 해주는 서울 논현동의 '코업'에 책상 하나를 빌려 회사를 세웠다. 옷을 둘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김 대표는 "'옷걸이 하나 정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빌려달라'고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렸더니 '돕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작은 IT 기업이 휴게실로 쓰던 82.6㎡(25평) 남짓한 공간을 내줬고 덕분에 창업 1년 만에 정식 사무실이 생겼다.

처음 몇 달은 수익이랄 게 없었다. 대신 '짜릿함'이 있었다. 대여 서비스를 막 시작한 2012년 7월 한 대학생이 입사 면접용 정장을 빌리러 왔다. 옷장에 옷이 10벌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그에게 맞는 사이즈가 있었다. 김 대표는 이 젊은이에게 자신의 직장생활 경험을 살려 이런저런 면접 팁도 함께 알려줬다.

"그 손님이 합격 통보를 받은 문자메시지를 내게 휴대전화 문자로 보내왔다. 회사에서 일하다 메시지를 받았는데 그렇게 놀랍고 벅찰 수가 없더라."

그날 김 대표는 다니고 있던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열린옷장에 완전히 뛰어들었다.

바지 길이·소매 수선도 직접 해

창업 10개월이 되니 수익도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흑자가 난 첫 달 수익은 50만원 정도. 수익이 나니 욕심도 생겼다. 손님을 잡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사진은 열린옷장 직원들이 직접 손빨래한 와이셔츠를 다리고 있는 모습.

한번은 발 사이즈가 215㎜인 여학생이 구두를 빌리러 왔다. 기증받은 구두 중엔 맞는 사이즈가 없었다. 김 대표는 자신이 신고 있던 220㎜짜리 구두를 벗어줬다. 이 일을 계기로 표준 사이즈 이외의 옷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여성복 중 가장 작은 사이즈인 '44'보다 더 작은 허리 22인치짜리 치마를 만들었고, 가슴둘레 100㎝짜리 여성용 정장 상의도 제작했다. 이젠 제일 큰 양복 상의는 사이즈 130까지 있다. 맞춤 정장 효과를 내기 위해 95㎝, 100㎝, 105㎝가 아니라 95㎝, 96㎝, 97㎝ 등 1㎝별 사이즈 정장도 구비해놓고 있다.

작년 가을부터 사업이 본궤도에 올랐다. 초기 한 달에 9명 정도에 불과했던 손님이 매달 1500명으로 늘었다. 직원도 하나둘씩 늘었다. 이전까지 무료로 썼던 사무실의 월세(100만원)를 자발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사무실 월세와 직원 월급 등을 빼고 남는 돈으로 또 다른 활동을 시작했다. 국립재활원 환자들이 매년 리마인드 결혼식을 할 때 양복을 빌려주고 꽃다발과 화환도 보내기로 했다. 국립재활원에선 입원 생활이 길어진 환자들이 부부사이를 돈독하게 다질 수 있도록 해마다 리마인드 웨딩 행사를 하는데 이를 지원하는 것이다.

연말엔 한 노인 야학 졸업식에도 정장을 빌려주고 행사를 돕기로 했다. 김 대표는 "직원들 임금이 아직 최저임금 수준이지만 열린옷장 취지를 생각해 다양한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열린옷장’에 정장을 기증한 사람들이 옷에 얽힌 사연을 적은 편지와 옷을 빌린 사람들의 감사 편지가 대기실 한쪽 벽을 채우고 있다.

열린옷장에선 공동 대표 두 명을 포함한 직원 11명이 팔을 걷어붙이고 와이셔츠를 손으로 빨고 다림질해 칼주름을 잡는다. 김 대표는 "면접 한 시간 전에 헐레벌떡 뛰어와 정장을 찾는 사람도 있다"면서 "바지 길이나 소매 등은 즉석에서 수선해준다"고 했다.

직원들은 경기도의 한 50대 세탁소 주인 부부의 '특별 지도'도 받았다. 세탁소 주인 부부는 열린옷장의 사연을 알고 '도와주겠다'고 전화를 했다. 직원 모두가 경기도에 있는 세탁소에 가서 옷감 소재에 따라 다른 빨래 방법부터 다림질, 옷 수선 방법까지 배웠다. 의상 관련 학과를 졸업한 직원은 한 명도 없지만 덕분에 직원들은 이제 세탁소를 차려도 될 만큼 손이 빨라졌고 기술도 늘었다.

열린옷장은 앞으로 옷 사진을 하나하나 찍어 홈페이지에 올려 지방에 있는 사람들도 택배로 받아볼 수 있게 할 계획이다.

"꿈꾸던 기업에 합격한 선배가 면접 때 입었던 정장을 또 다른 꿈을 꾸는 후배가 입는다. 옷을 빌린 사람이 그 옷을 빌려준 사람의 긍정적 기운과 합격의 에너지까지 함께 받는다면 더 할 수 없이 멋진 일이 아닐까."

김 대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