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 입사 면접을 치르게 됐어요. 면접 때 입을 만한 정장을 사려고 알아보니 한 벌에 최소 20만원은 들겠더라고요. 친구들에게 빌리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아 고민하다 우연히 싼값에 정장을 빌려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고 한달음에 뛰어왔어요."
지난 22일 오후 서울 광진구 화양동 '열린옷장(www.theopencloset.net)' 탈의실에서 만난 김은희(22·대학생)씨는 급하게 면접용 정장을 빌리러 왔다고 했다. 직원은 김씨의 키, 가슴둘레, 엉덩이 둘레 등 치수를 잰 후 검은색 정장 재킷과 치마, 흰 블라우스 한 벌을 가져다줬다.
이날 '열린옷장' 대기실엔 옷을 빌리러 온 사람 10여명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장을 입어야 할 순간은 의외로 많다. 면접, 졸업사진 촬영, 상견례 등이 그런 순간들이다. 하지만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 가야 할 때 '입을 만한 옷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열린옷장'은 그런 사람들에게 소액의 대여료를 받고 '옷장'이 되어주는 곳이다. 재킷 1만원, 바지·치마 1만원, 셔츠·블라우스 5000원 등 세탁비 정도만 내면 옷을 빌릴 수 있다. '취업 준비생들에게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가 대여료 책정의 기준이다. 대여 기간은 3박 4일. 하루 늦어질 때마다 대여료의 20%를 연체료로 받는다.
기증받은 정장 돈 받고 빌려준다
김소령(44) 대표가 '열린옷장'의 문을 처음 연 건 2012년 7월. 이후 약 3년 동안 2만5000여명이 열린옷장에서 옷을 빌려 입었다.
옷장 문이 열릴 때마다 다양한 사연이 쌓였다. 여자 친구에게 청혼하기 위해 미국에서 급히 귀국하느라 정장을 챙겨오지 못한 대학생은 열린옷장에서 검은색 양복을 빌려 입고 청혼해 결혼했다.
한 50대 남성은 사고를 당해 2년째 수술과 입원을 반복하던 중 아내와 리마인드 웨딩 촬영을 하기 위해 정장을 빌렸다. 형편이 어려워 딸 결혼식에 입고 갈 정장을 마련할 수 없었던 아버지도 이곳에서 번듯한 양복을 빌려 입고 식장에 갔다.
열린옷장이 보유하고 있는 정장은 모두 1000벌, 셔츠와 넥타이·벨트 등 액세서리까지 합치면 4000점이 넘는다. 대부분 기증받았다. 첫 기증자는 설립자인 김 대표와 공동대표 한만일씨였다. 각자 자신의 옷장에 있던 잘 입지 않는 정장 몇 벌을 꺼냈다. 친구와 선후배들의 옷장에서 잠자던 정장도 받아왔다. 그렇게 10벌 정도가 마련되자 김 대표는 홈페이지를 열고 대여 서비스를 시작했다.
SNS를 통해 조금씩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기부가 이어졌다. 어떤 사람은 '중학교 교사 임용시험 면접 때 아버지가 마련해준 첫 정장'이라며 옷 한 벌을 보냈다. '꿈 많던 취업 준비생 시절 학교 선배가 물려준 행운의 넥타이'를 기부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20년 전 그 넥타이를 매고 면접을 봐서 취업에 성공했다고 했다.
그렇게 사연이 쌓이고 옷이 쌓였다. 개그맨 김준현씨는 넉넉한 사이즈의 양복을 보내왔다. 한국도로공사 교통캐스터들은 여성용 정장 여러 벌을 기증했다. NH농협은행과 법무법인 태평양에서도 직원들이 안 입는 정장을 모아 보냈다. 지금까지 1700여명이 입지 않는 옷을 들고 직접 찾아오거나 택배로 보냈다.
열린옷장 페이스북 공지 사항엔 "입사 면접에서 입을 수 있을 만큼 깔끔하고 어두운 색의 정장만 보내 달라"는 '기증 가이드'가 안내돼 있다. 하지만 청바지나 티셔츠 등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직원들은 이런 옷들을 골라 가방 등을 만들거나 옷을 필요로 하는 다른 곳으로 보낸다.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월급 0원'서 시작
'열린옷장'은 우연히 시작됐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김 대표는 직장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중 2011년 사회적기업 연구단체인 희망제작소에서 운영하는 소셜디자이너스쿨을 찾았다. 사회적 기업 대표들이 강연하고 수강생들이 직접 아이디어를 기획하는 3개월짜리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 김 대표가 내놓은 기획안이 바로 열린옷장이었다.
김 대표는 "청년 실업, 청년 취업난이 심각하다는 뉴스가 매일 쏟아졌다. 내가 그들을 취업시켜줄 순 없지만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 비싼 옷값이 떠올라 열린옷장을 구상하게 됐다"고 했다. 기획안을 만들면서 설문 조사를 해 보았다. 취업 준비생들은 1년에 평균 2.8회쯤 입는 면접용 정장을 한 벌 평균 35만7000원에 구매하고 있었다.
창업 비용은 한 푼도 안 들었다. 정장뿐 아니라 책상과 의자, 사무실까지 모두 기증을 받아 꾸렸다. 창업 지원을 해주는 서울 논현동의 '코업'에 책상 하나를 빌려 회사를 세웠다. 옷을 둘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김 대표는 "'옷걸이 하나 정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빌려달라'고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렸더니 '돕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작은 IT 기업이 휴게실로 쓰던 82.6㎡(25평) 남짓한 공간을 내줬고 덕분에 창업 1년 만에 정식 사무실이 생겼다.
처음 몇 달은 수익이랄 게 없었다. 대신 '짜릿함'이 있었다. 대여 서비스를 막 시작한 2012년 7월 한 대학생이 입사 면접용 정장을 빌리러 왔다. 옷장에 옷이 10벌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그에게 맞는 사이즈가 있었다. 김 대표는 이 젊은이에게 자신의 직장생활 경험을 살려 이런저런 면접 팁도 함께 알려줬다.
"그 손님이 합격 통보를 받은 문자메시지를 내게 휴대전화 문자로 보내왔다. 회사에서 일하다 메시지를 받았는데 그렇게 놀랍고 벅찰 수가 없더라."
그날 김 대표는 다니고 있던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열린옷장에 완전히 뛰어들었다.
바지 길이·소매 수선도 직접 해
창업 10개월이 되니 수익도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흑자가 난 첫 달 수익은 50만원 정도. 수익이 나니 욕심도 생겼다. 손님을 잡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한번은 발 사이즈가 215㎜인 여학생이 구두를 빌리러 왔다. 기증받은 구두 중엔 맞는 사이즈가 없었다. 김 대표는 자신이 신고 있던 220㎜짜리 구두를 벗어줬다. 이 일을 계기로 표준 사이즈 이외의 옷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여성복 중 가장 작은 사이즈인 '44'보다 더 작은 허리 22인치짜리 치마를 만들었고, 가슴둘레 100㎝짜리 여성용 정장 상의도 제작했다. 이젠 제일 큰 양복 상의는 사이즈 130까지 있다. 맞춤 정장 효과를 내기 위해 95㎝, 100㎝, 105㎝가 아니라 95㎝, 96㎝, 97㎝ 등 1㎝별 사이즈 정장도 구비해놓고 있다.
작년 가을부터 사업이 본궤도에 올랐다. 초기 한 달에 9명 정도에 불과했던 손님이 매달 1500명으로 늘었다. 직원도 하나둘씩 늘었다. 이전까지 무료로 썼던 사무실의 월세(100만원)를 자발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사무실 월세와 직원 월급 등을 빼고 남는 돈으로 또 다른 활동을 시작했다. 국립재활원 환자들이 매년 리마인드 결혼식을 할 때 양복을 빌려주고 꽃다발과 화환도 보내기로 했다. 국립재활원에선 입원 생활이 길어진 환자들이 부부사이를 돈독하게 다질 수 있도록 해마다 리마인드 웨딩 행사를 하는데 이를 지원하는 것이다.
연말엔 한 노인 야학 졸업식에도 정장을 빌려주고 행사를 돕기로 했다. 김 대표는 "직원들 임금이 아직 최저임금 수준이지만 열린옷장 취지를 생각해 다양한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열린옷장에선 공동 대표 두 명을 포함한 직원 11명이 팔을 걷어붙이고 와이셔츠를 손으로 빨고 다림질해 칼주름을 잡는다. 김 대표는 "면접 한 시간 전에 헐레벌떡 뛰어와 정장을 찾는 사람도 있다"면서 "바지 길이나 소매 등은 즉석에서 수선해준다"고 했다.
직원들은 경기도의 한 50대 세탁소 주인 부부의 '특별 지도'도 받았다. 세탁소 주인 부부는 열린옷장의 사연을 알고 '도와주겠다'고 전화를 했다. 직원 모두가 경기도에 있는 세탁소에 가서 옷감 소재에 따라 다른 빨래 방법부터 다림질, 옷 수선 방법까지 배웠다. 의상 관련 학과를 졸업한 직원은 한 명도 없지만 덕분에 직원들은 이제 세탁소를 차려도 될 만큼 손이 빨라졌고 기술도 늘었다.
열린옷장은 앞으로 옷 사진을 하나하나 찍어 홈페이지에 올려 지방에 있는 사람들도 택배로 받아볼 수 있게 할 계획이다.
"꿈꾸던 기업에 합격한 선배가 면접 때 입었던 정장을 또 다른 꿈을 꾸는 후배가 입는다. 옷을 빌린 사람이 그 옷을 빌려준 사람의 긍정적 기운과 합격의 에너지까지 함께 받는다면 더 할 수 없이 멋진 일이 아닐까."
김 대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