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칼국수를 좋아했다. 대통령 시절 청와대 주메뉴로 칼국수가 올라왔고, 청와대는 국무회의나 각종 회담 자리에 칼국수를 내놓았다. 군사정권 이후 처음 들어선 문민정부에서 대표적인 서민 음식인 칼국수가 청와대 단골 메뉴로 올라오면서 화제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간 직후 칼국수를 만들라고 청와대 조리사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이후 청와대를 방문한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밀 살리기 운동’ 동참을 권유하자, 김 전 대통령은 “우리밀로 칼국수를 만들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밀로 만든 칼국수는 끈기가 없어 끊어졌다. ‘청와대 칼국수는 숟가락으로 퍼먹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안동국시’ 식당을 운영하던 고(故) 김남숙 여사를 청와대로 초청해, 청와대 조리사에게 비법을 가르치도록 했다. 경북 안동 양반가문 출신으로 1985년부터 칼국수를 만들어 팔았던 김씨는 이후 ‘YS 칼국수 할머니’라 불리며 유명해졌다. 김씨는 이후 식당을 서울 양재동으로 옮기고 상호를 ‘소호정(笑豪亭)’으로 바꿨다. 호걸들의 웃음이 있는 집이란 뜻이다.

당시 청와대 칼국수는 김 전 대통령 임기 초반 개혁의 상징이었다. 칼국수는 김 전 대통령의 절약과 청렴, 개혁 의지를 드러내는 음식이었다. 청와대 민원실에는 하루 300~400통의 칼국수 격려 편지가 왔다고 한다. 외국정상과의 회담에서도 청와대 칼국수는 화제였고, 외신들도 김 전 대통령이 절약을 위해 칼국수를 먹는다고 보도했다. 칼국수 때문에 생긴 일화도 많았다. 김 전 대통령이 평소 소식(小食)을 해 ‘청와대 칼국수’ 양이 적은데다 소화가 잘 돼, 한 번 먹으면 금방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청와대 직원에게 칼국수를 좀 더 달라고 미리 부탁하거나,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먹고 나와 식사를 한 번 더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2001년 낸 회고록에서 칼국수 이야기와 함께,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 방 전체가 금고인 공간이 있어서 없애버렸다” “대통령 관저에 큰 노래방 기계가 있어 치우도록 했고, 직원들도 밤늦게 연회가 열릴지 모르겠다며 대기하기에 퇴근하도록 했다” “청와대 골프 연습장을 없애고 달리기 코스를 직접 설계했다”고 했다.

하지만 임기 말인 1997년 한보그룹 비리 사건이 터지고, 차남 김현철씨가 수사 대상에 오르면서 칼국수도 인기를 잃었다. 절약의 상징이었던 칼국수가 ‘쇼’라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청와대에서 칼국수가 올라오는 횟수도 크게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