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국희 특파원

쿠바 아바나대 국제어학원의 스페인어 교사 벡키(24)씨는 강의가 끝난 후 하루 2시간씩 영어 개인 교습을 받고 있다. 그녀는 "미국과 수교했으니 앞으로 영어를 잘해야 좋은 일자리 기회가 많이 생길 것 같아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최근 쿠바 정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 점수를 받지 못하면 대학에서 학위를 받을 수 없게 하겠다"고 밝혔다. 국영 신문과 TV는 "쿠바 경제를 국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영어가 필수적"이라며 계몽에 나서기도 했다. 아바나 거리에 영어 학원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3개월 코스 기초 회화를 가르친다는 학원 관계자는 "매달 10여 명씩 신규 수강생이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학원비는 한 달에 10쿡(약 1만2000원) 정도로, 노동자 평균 월급(30쿡·약 3만6000원)을 감안하면 비싼 편이다.

이달 초 쿠바 여행을 온 이모(45)씨는 "아바나의 호텔 5곳을 돌아다녔지만 빈방을 찾지 못했다"며 "호텔 로비마다 미국인이 가득했다"고 했다. 이씨는 정부 허가를 받은 민박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쿠바 해변의 고급 리조트는 스페인어와 살사 음악 대신 영어와 팝송이 점령했다. 미 잡지 뉴스위크는 "아바나 거리에서 미국식 영어 억양을 듣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고 했다.

1961년 미국과 단교(斷交) 이래 50여 년간 잠들어 있던 쿠바가 깨어나고 있다. 오는 17일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53년간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를 선언한 지 1년째 되는 날이다.

쿠바 아바나에서 청소년들이 사설 영어 학원 앞을 걸어가고 있다.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 이후 쿠바에는 사설 영어 학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도로에는 1950년대식 미국의 올드카 택시가 지나가고 있다.

쿠바에는 18홀 골프장이 한 곳밖에 없다. 관광 소득이 국가 경제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지난 50여년간 미국의 경제 제재가 이어지며 외국인 투자나 인프라 개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국 국교 정상화 선언 이후 미국 등 서방의 '사람'과 '돈'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지난달부터 미국 한 은행의 직불카드가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쿠바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지난 6월에는 미국의 한 민간 재단이 아바나 근교의 소설가 헤밍웨이 저택 개·보수 사업 승인을 받았다. 이 사업을 위한 물자가 미국에서 쿠바로 건너가는 것도 단교 이후 처음이다. 미 플로리다주와 아바나를 잇는 미국의 여객선 운행도 쿠바 정부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145㎞ 거리인 미 마이애미와 아바나 간 비행기 항로도 열렸다. 세계 최고급인 '쿠바의 자존심' 시가 업계도 바빠졌다. 쿠바 국영담배회사 '아바노스'는 "수년 내 미국 프리미엄 시가 시장의 70%를 장악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는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면 미국의 대(對)쿠바 수출은 59억달러, 수입은 67억달러로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쿠바 정부는 내년 7% 경제성장을 목표로 잡았다. 외국인 직접 투자를 늘리기 위해 작년 하반기부터 외국인의 기업 지분 100% 소유를 인정하고 있다. 그전까지 외국계 자본의 지분 한도는 49%였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Granma)'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한 관광 분야다. 올해 미국 관광객은 작년 2배인 20만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연간 해외 관광객 400만명 돌파도 눈앞에 두고 있다. 쿠바의 열악한 인터넷 사정에도 지난 4월 미국의 세계적 온라인 숙박공유업체 '에어비앤비'가 쿠바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라울 카스트로 정권은 2011년부터 식당, 민박, 택시, 미용실 등 200여 개 업종에 대해 민간 자영업을 허용하고 있다. 아바나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제시카(50)씨는 "외국인 등 손님이 늘어나 돈을 많이 버는 쿠바인 사이에는 정부의 세금 징수를 피하기 위해 겉으로 티를 내지 않는 '저자세(bajo perfil)'가 유행"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