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명품 대신 미술 호황…인사동은 사실화, 청담동은 추상화가 인기
디올·버버리 등 명품 건축 경쟁…레페토 이어 오메가·보스도 리모델링 돌입
건축가와 예술가가 유혹하는 '문화 중심지'로 변신 중
컨버스화를 신고 레깅스를 입은 젊은 여자는 옅은 하늘색으로 물들인 털코트를 둘렀다. 이름부터 ‘명품관’인 갤러리아백화점 지하 식품관에서 산 딸기 한 팩을 들고, 다른 한 손엔 클러치백을 쥔 채. 코트 단추를 목끝까지 채우고도 모자라 목도리를 되감는 기자 옆으로, 몸에 딱 맞는 정장에 새빨간 실크 넥타이를 한 남자가 코트를 어깨에 ‘걸친 채’ 지나간다.
탁 트인 대로를 따라 명품 브랜드 매장들이 줄을 맞춰 늘어섰다. 눈에 보이는 자동차 세 대 중 한 대는 외제차다. 고작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를 걸었을 뿐인데, 독일 도시를 걸을 때만큼 많은 독일차가 지나간다.
여기까지가 그동안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발을 디딘 횟수를 한 손으로 꼽는 기자가 예상하고 실제로 본, 청담동의 인상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급’과 ‘고가’를 향한 욕망이 고인 섬같은 곳.
이 지역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잠깐 내려놓으면 새로운 사실들이 눈에 들어온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공들여 지은 플래그십스토어(브랜드의 고유한 이미지와 상품의 특징, 디자인을 최대한 부각시킨 대형 단독 매장), 북촌이나 인사동만큼이나 많은 갤러리(화랑)들. ‘돈 냄새’만 나던 청담동에서 예술적인 향취가 흐르고 있다.
◆ 청담동, 명품 대신 미술 호황…인사동은 사실화, 청담동은 추상화가 인기
1980년대까지만 해도 청담동은 문화적인 기반이 부족한 신도시였다. 권력층이 특혜 분양을 받고, 분양 프리미엄이 천정부지로 솟은 고급 주거지역. 분위기를 바꾼 건 새로운 고객을 찾아 청담동으로 건너온 갤러리들이다. 박여숙화랑의 이전과 함께 1990년대 내내 갤러리들이 청담동에 문을 열었다.
올해로 39년째 청담동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이란영(84) 갤러리미 대표는 “인사동과 청담동을 비교하면 갤러리들이 주로 취급하는 작품의 종류나 잘 팔리는 작품의 특징이 다르다”고 말했다. “인사동은 사실적이고 고전적인 작품들이 많은 편인데, 청담동엔 실험적이고 추상적인 작품들이 많아요. 고객들이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모험적인 작품들을 선호하니까. 외국 작가에 대한 선호도도 높지요.” 최근 들어선 미술품 쇼핑을 다니는 30, 40대 젊은 고객들이 부쩍 늘었다고 덧붙였다.
청담동 갤러리를 한 바퀴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남미, 영미계 작가들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청담동을 대표하는 갤러리 중 하나인 박여숙화랑에선 오는 22일까지 영국 유학파 예술가 3인방의 전시를 ‘조우: 이야기가 시작되는’이란 주제로 진행하고, 쥴리아나갤러리는 20일까지 김영원 조각전을 진행한다. 유아트스페이스는 갤러리 베아르떼와 공동으로 남미 현대미술 기획전을 열었고, 갤러리엠은 일본 작가 타케오 하나자와의 조각과 회화를 전시했다. 해마다 12월이면 청담동 갤러리들이 날짜를 맞춰 크리스마스 기획전을 진행하기도 한다.
갤러리에 대해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네이처포엠’이다.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은 건축가 조민석 대표가 이끄는 건축사무소 매스스터디스가 설계한 건물이다. 2005년 완공된 이 건물엔 독일에 본사를 둔 마이클슐츠갤러리, 프랑스 계열인 오페라갤러리 등 외국 갤러리들도 머물렀다. 투명한 유리 전시장 같은 네이처포엠에는 현재 갤러리 7곳과 인테리어사무소, 가구와 보석매장 등이 우아하게 모여 있다.
‘청담동 명품거리’의 서막을 올린 건 1990년 개관한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이다. 갤러리아 백화점을 한 끝점으로, 청담사거리까지 이어지는 명품 매장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지방시, 엠포리오아르마니, 페라가모, 프라다, 돌체앤가바나, 루이뷔통, 구찌, 디올, 버버리 등이 최소 3층이 넘는 건물에 단독으로 매장을 냈다. 1996년 서울시가 이 지역을 명품 특화거리로 조성하면서 ‘청담동 명품거리’가 공식화됐다. 돈 많은 부모 덕을 보며 향락을 일삼는 ‘압구정 오렌지족’이나, 재벌가에 시집간 여성들의 꾸밈새를 뜻하는 ‘청담동 며느리룩’ 같은 말들이 생겨났다.
◆ 최신 디자인 전람회장 된 청담동…패션매장에도 예술작품 전시
갤러리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문화의 터를 닦았다면, 요즘 청담동을 예술적으로 만드는 건 명품 매장들이다. 세계적인 패션브랜드들이 청담동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 ‘디자인’과 ‘문화공간’을 강조하는 분위기다. 최근 2~3년새 새롭게 등장하거나 단장한 매장들이 특히 이채롭다. 브랜드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모아두는데 그치지 않고, 매장 안을 예술작품으로 꾸미고 별도로 갤러리를 마련할 정도다.
2015년 6월 문을 연 프랑스 패션브랜드 디올의 플래그십스토어 ‘하우스 오브 디올’이 대표적이다. 브랜드 로고만 커다랗게 박은 비슷비슷한 직사각형 건물 사이에서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꽃잎이 막 벌어지는 튤립 꽃송이를 닮았다.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Pritzker)상을 받은 프랑스 건축가 크리스찬 드 포잠박(Christian de Portzamparc)이 설계한 것으로, 여성용 고급 맞춤복(오뜨꾸뛰르) 브랜드로 시작한 디올의 물결치는 드레스 자락을 형상화했다. 실내 디자인은 세계적인 건축가인 피터 마리노(Peter Marino)가 맡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예술작품의 향연이 이어진다. 1층으로 들어서면 크리스털과 유리,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대형 설치작품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한국의 현대 예술가인 이불의 작품이다. 1층부터 4층까지 기둥 없이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은, 말아올린 체조용 리본을 연상시킨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벽스크린에서 재생되는 프랑스 비디오아티스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4층엔 갤러리가 자리를 잡았다. 현재는 전 세계 예술가들에게 디올의 대표적인 가방 모델 ‘레이디 디올’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의뢰해, ‘(타인의) 눈에 비친 레이디 디올(Lady Dior as seen by)’이란 주제로 전시 중이다. 디올 꾸뛰르의 이은정 총괄이사는 “하우스 오브 디올은 단순히 상품을 판매한 매장이 아닌, 복합적인 문화공간을 목표로 꾸몄다”며 “건축가나 디자이너들이 건축 구조와 인테리어 디자인을 직접 보려고 매장을 찾아오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H&M그룹의 패선브랜드 코스(COS)가 연 플래그십스토어에도 전시공간이 따로 있다. 4층의 ‘프로젝트 스페이스’다. 본사에서 기획해 여러 예술가들이 작업한 공동전시를 연다. 이달 26일까지는 ‘그림자 사물(Shadow object)’이란 주제로 도자기부터 사진, 가구, 조각품 등을 둘러볼 수 있다.
대만에서 백화점 브랜드 입점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키쓰 장(32)은 서울의 주요 쇼핑지구를 둘러보러 한국을 찾았다. 매장을 어떻게 어떤 콘셉트로 꾸미고, 어떤 브랜드들이 진출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부터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청담동을 훑었다. 그는 “전반적으로 매장들의 분위기나 디자인이 예술적이어서 인상 깊다”고 평했다.
청담동 명품거리의 끝은 버버리의 플래그십스토어가 장식한다. 버버리의 최고경영자(CEO)인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설계부터 내부 인테리어까지 감독한 이 건물은, 청담동 명품거리에선 흔치 않은 높이를 자랑한다. 금속으로된 비대칭적인 꼭대기층의 모양은 서울의 역동적인 이미지를 반영했다.
지하 주차장을 포함해 총 13층인 파사드(건물의 정면)는 금속 소재의 레인스크린(벽의 통기층)으로 둘러쌌다. 레인스크린에는 개버딘 소재의 짜임을 닮은 작은 구멍들이 촘촘히 나 있다. 레인스크린을 양각과 음각으로 처리해, 금속 사이에 장치한 조명 빛이 밖으로 새 나오면 버버리의 체크무늬가 나타난다.
지난해 9월 세계 최대 규모의 매장을 청담동에 낸 이탈리아 속옷 브랜드 라펠라(La Perla)는 이탈리아 건축가 로베르토 바치오키(Roberto Baciocchi)에게 설계를 맡겼다. 바치오키는 프라다와 미우미우 등 명품 브랜드의 매장을 디자인한 경력이 있다. 스웨덴의 패션브랜드 아크네스튜디오는 같은 달 영국의 유명 건축가 소피 힉스(Sophie Hicks)가 설계한 플래그십스토어를 열었다.
청담동의 예술적인 진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프랑스 브랜드 레페토(Repetto)가 지난달 새 단장을 마친데 이어, 스위스 시계브랜드 오메가와 독일의 패션브랜드 보스도 리모델링에 돌입했다. 까르띠에와 샤넬도 청담동 명품거리에 플래그십스토어를 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