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서울 방배동 엑스비전테크놀로지 사무실 컴퓨터 모니터마다 화면이 절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화면 왼편에는 한글 교과서를 띄워 놓은 창이, 오른편엔 까만 점으로만 이뤄진 기호가 빼곡히 적힌 창이 열려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깨알만 한 점들은 2열 3행으로 이뤄진 점자였다. 중학교 2학년 국사 교과서를 오른쪽 창에 점자로 옮기던 8년차 점역사(點譯士) 손민희(32)씨는 "번거롭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손을 거쳐야 교과서를 제대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손씨의 손가락은 멈출 줄 몰랐다.

점역사 손민정(오른쪽부터)씨와 손민희씨가 완성된 점자 교과서를 눈으로 재확인하는 동안 시각장애인인 김정호 대표(가운데 남자)는 손으로 읽고 내용이 맞는지 검토하며 점자 교과서를 만들고 있다.

일반 학교에 다니는 시각장애 학생들을 위해 교과서를 점자 교과서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맹학교가 아니라 집 근처 일반 학교에 다니는 시각장애 학생은 전국 초중고를 통틀어 17명이다. 이들을 위해 초중고 총 12학년 107종의 교과서를 점역하는 것이다. 전국에 12개 있는 맹학교에선 수업에 필요한 교과서와 자료를 자체적으로 만들지만 일반 학교에선 점자 교과서를 받기조차 어렵다. 비장애학생들은 학기가 시작하기 한 달 전쯤 교과서를 받지만 이들과 수업을 같이 듣는 시각장애 학생 대부분은 4월 중순까지 책 없이 공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시각장애 학생들이 있다 해도 학기 시작 직전이 돼서야 그런 사실이 파악됐고 각 지역 교육청에서 그제야 장애학생에게 필요한 점자 교과서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17명을 위해 지난해 말 국립특수교육원이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3월 초 1학기 시작과 동시에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점자 교과서를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함께한 업체가 엑스비전테크놀로지다. 이 회사는 시각장애인용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다. 대표 김정호(44)씨를 포함해 직원 15명 중 8명이 시각장애인이고 그중 7명이 개발자다. 2008년 시각장애인 최초로 판사가 된 서울 북부지법 최영 판사가 엑스비전테크놀로지의 글자 읽어주는 프로그램 '센스리더'로 사법시험 공부를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엑스비전테크놀로지는 사업자로 선정된 당일인 작년 12월 23일 오후부터 교과서 점역을 시작했다. 2월 말까지 점자 교과서를 내놓아야 하는데 남은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다. 검인정 교과서인 터라 출판사마다 서로 다른 교과서를 만드는 데다 교과서를 내놓는 시기도 모두 다르다. 한 출판사는 2월 초에나 새 학기 교과서를 찍어낸다. 분량도 어마어마하다. 80쪽짜리 교과서를 점역하면 보통 7배 정도 많은 분량이 된다. 각 출판사 상황을 고려하고 교과서 점역과 편집까지 끝내려면 두 달이 부족할 정도다. 프리랜서 점역사 100여명을 모아 일을 나누고 직원들은 주말을 반납했다. 지난 두 달간 매일 14시간씩 강행군을 했다. 김 대표는 "올해 2월이 29일까지 있어서 참 다행"이라며 웃었다.

글씨만 옮기는 게 아니다. 사진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 학생들을 위해 사진 설명까지 따로 붙여준다. 외국어 번역처럼 점자로 옮기는 것을 점역이라고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예를 들어 빗살무늬 토기 사진이 있다면 '겉면에 대각선 빗살이 새겨진 원뿔형 황토색 그릇'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점역은 수학이나 과학 교과서가 손이 가장 많이 간다. 점역사 손민정(30)씨는 "우리나라엔 아직 기호나 알파벳을 정확하게 점역하는 프로그램이 없어 1쪽부터 전부 손으로 입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학 교과서에 그림이 나와 있고 '빗금 친 부분의 넓이를 구하라'는 문제가 나오면 도형의 크기와 빗금의 굵기를 조절하는 등 그림을 일일이 그려야 한다. 교과서가 친절하게 변하면서 점역사들의 일은 한층 번거로워졌다. 과거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영희가 철수에게 '안녕?'이라고 말했다"고 쓰여 있었다면 요즘 교과서에는 영희와 철수 그림이 있고 각각 말풍선 속에 "안녕?"으로 적혀 있다. 점자 교과서에서는 이 상황을 '영희와 철수가 ○○○라고 말했다'고 일일이 고쳐 표현해줘야 한다.

엑스비전테크놀로지 김 대표는 "시각장애인이 취업을 하는 등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라며 "우리가 만드는 점자 교과서가 단순히 교과서가 아니라 장애 학생들의 미래를 열어주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