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도(76·사진) 전 국토통일원 장관이 지난 5일 오전 7시 30분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서울대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언론인 출신인 허 전 장관은 전두환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비서관, 문공부 차관, 청와대 정무수석 등을 역임했다.
194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허 전 장관은 부산고, 서울대 농대를 나와 196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도쿄 특파원과 외신부 차장 등을 지냈다. 1979년 주(駐)일본대사관 공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발탁됐다. 전두환 정권의 군(軍) 출신 실세들인 허삼수·허화평과 함께 '3허(許)'로 불리기도 했다.
허 전 장관과 가까웠던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은 6일 "허 전 장관은 조국의 근대화 완성을 목표로 2~3차례 일본 유학을 하는 등 평생 일본을 연구하고 극일(克日)을 위해 고심했다"며 "공직에 있을 때 내놓은 정책이 모두 그런 고민의 산물"이라고 했다. 허 전 장관은 5공화국 초기 '일본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제기해 일본으로부터 100억달러의 경협 차관을 받아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일본이 안보 걱정 없이 경제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막대한 국방비 지출 덕분이니 안보 비용을 부담하라는 논리였다. 인 회장은 "한·일 교섭 끝에 경협 규모는 40억달러로 줄었지만, 이 돈이 1980년대 한국 경제가 비상하는 데 종잣돈 역할을 했다"고 했다.
허 전 장관은 1984년 9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일본 방문 때 히로히토(裕仁) 전 일왕으로부터 일제(日帝)의 식민 지배에 대한 유감 표명과 "6~7세기 일본의 국가 형성 시기에 한국(백제)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는 취지의 발언을 끌어냈다. 한·일 외교 당국이 사과 문구를 놓고 고민하자 허 전 장관이 '고대사를 끌어와 감사를 표시하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이다.
허 전 장관은 1980년 전국 64개 언론사를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합한 언론 통폐합에도 깊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까지도 허 전 장관은 "일본이 근대 국가 건설 과정에서 국론을 결집하는 데 언론통폐합 정책 덕이 컸다"며 "내가 낸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적극 지지했고, 지금도 그 신념엔 변함이 없다"고 말해왔다. 그는 1988년 5공 비리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불려나와 위증 혐의로 고발도 당했지만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수경씨와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분당 서울대병원(031-787-1501), 발인은 8일 오전 6시, 장지는 경남 고성군 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