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주역에서 '나자레원'까지는 승용차로 40분, 불국사 근처 동네였다.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 마당 있는 2층 건물 앞에 차가 멈췄다.
나는 마침내 현대사(現代史)의 '그늘'로 들어왔다. 나자레원은 '부용회(芙蓉會) 할머니'를 돌보는 시설이다. 부용회는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가 해방 뒤 버림받고 내쳐진 일본인 아내들의 모임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한국 사회에서 파혼(破婚)과 냉대, 멸시를 겪었던 이들은 한때 4000명쯤 됐다. 이제 대부분 저세상 사람이 됐다. 나자레원에는 일본 할머니 20명이 거주하고 있고, 평균 나이는 92세다.
나자레원은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나눔의 집'과 대비된다. 위안부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조직적 강제동원과 관계있다면, 부용회 할머니는 해방 후 우리 사회와 개인의 성숙(成熟)과 관계있는 것이다.
송미호(66) 나자레원 원장이 나타났다. 작은 체구, 금속 테 안경, 뒤로 묶은 생머리, 짙은 색 정장 차림은 엄격한 기숙사 사감을 연상시켰다. 지금까지 그녀는 매스컴에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일본인 할머니를 돌본다는 것은 일종의 '금기(禁忌) 행위'와 비슷한 것이었다.
"우리 민족은 일본의 피해자였기에 이분들 존재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던 거죠. 국내에서는 혹시 알게 되면 '쪽발이년 돕는다'고 욕을 했지요."
그녀는 자신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날 교직 생활을 잠깐 하다가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여기에 두세 달 자원봉사를 하러 와 나자레원 설립자인 김용성 선생(1918~2003년)을 만난 게 인연이 됐다. 그 뒤 다시 내려와서는 지금까지 이어졌다.
"우선 김용성 이사장님에 대해 아셔야 합니다. 이분은 함경북도의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었어요. 선친이 일제 강점기 때 옥사(獄死)를 하셨지요. 고아처럼 자라다가 선교사의 보살핌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중국 창춘(長春)으로 건너가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어요. 6·25가 터지자 경주로 피난 내려와 고아원, 양로원, 모자원을 열었습니다…."
한참 듣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그녀의 말에 끼어들었다.
―나자레원이 설립된 게 1972년이었지요?
"당초에는 일본인 아내들의 귀국을 돕기 위한 임시 수용소 '귀국자료(寮) 나자레원'이었어요."
―왜 이들은 해방 직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겁니까?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은 패망 직후 대부분 돌아갔어요. 아주 드물게 안 돌아간 이들도 있었지만요. 사실 '부용회' 회원들의 8할은 해방 직후 거꾸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일본 여성들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한국에서 살았던 게 아니라 해방 직후에 들어왔던 일본인 아내라는 뜻인가요?
"일본으로 유학, 징용, 징병을 온 한국 남자들과 눈맞아 살았던 거죠. 청춘(靑春)의 사랑이 그렇지 않습니까. 해방이 되자 한국 남자를 따라 들어온 겁니다. 막상 한국에 도착해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해방 직후 남아 있는 일본인들도 맞아 죽을 판인데, 그런 사회 분위기를 전혀 몰랐어요. 게다가 사랑했던 남자는 이미 한국에 가정이 있거나, 안 그런 경우에도 시집의 구박과 학대가 심했지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을 때 왜 이들은 일본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지요?
"한·일 국교가 단절되면서 배편이 끊겼어요. 그 시절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이들에게 지옥이었을 겁니다. 6·25도 겪었지요. 여성의 몸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을 겁니다. 남의 집 식모를 하거나 술집에서 몸을 판 분들도 많았어요."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뒤로는 대부분 돌아갈 수 있었습니까?
"꽤 돌아갔을 겁니다. 이들의 존재를 우연히 알게 된 김용성 이사장님이 귀국 편의를 위해 경주에 나자레원을 세운 겁니다. 이들 사이에서 '경주 나자레원에 가면 일본에 갈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귀국 편의라면?
"배편 마련과 여비, 수속 절차를 도와주는 것이었어요. 무엇보다 할머니들의 일본 호적을 되찾는 게 우선이었어요. 일본 국적이 없거나 무국적자가 태반이었어요. 호적을 되찾기 위해 재판까지 해야 했지요. 그러다 보니 여기서 6개월, 1년씩 거주했어요. 무엇보다 다들 가겠다고 난리 쳤지만 일본 가족의 반응은 달랐어요. '그런 사람 모른다, 내 딸은 죽었다'고 칼처럼 끊었으니까요. 이들은 일본에 돌아가더라도 양로원 시설로 보내졌어요."
―몇 명을 귀국시켰습니까?
"1972년부터 146명을 보냈습니다. 그걸로 끝이다 싶었는데, 1984년 마지막 147번째가 있었어요."
―147번은?
"1980년 초 일본의 작가 가미사카 후유코(上坂冬子)가 경주에 놀러와 '나자레원'의 존재를 알게 됐어요. 여기서 한 달간 머문 뒤 돌아가서 '경주 나자레원'(1981년)을 출간했어요. 그 뒤 일본 언론과 사회단체의 방문이 끊이질 않았어요. 내가 여기서 일을 시작하던 때였어요. 일본 로터리클럽 회원들이 방문해 할머니들에게 "필요한 게 없느냐?"고 물었어요. 그때 왜소한 할머니 한 분이 "와타시노 이노치(내 생명). 나는 죽어도 일본으로 가겠다. 가방에 넣어서라도 데려가달라"고 말했어요. 그분이 147번째였어요."
그 할머니의 호적을 찾아보니 '사망'으로 돼 있었다. 다른 여성과 재혼한 한국 남편이 그녀를 사망신고 해버린 것이다. 일본 가족을 가까스로 찾았지만 '우리 집안에서 죽은 사람'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할머니는 법적으로 양국(兩國)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거죠. 당시 일본의 나카소네 총리까지 나선 덕분에 '수화물'로 비밀리에 내보냈어요. 그 뒤로 여기 살던 할머니 중 7명이 일본 호적을 취득할 수 있었어요."
―그분의 스토리는 해피엔딩입니까?
"147번째 할머니는 일본 아오모리 양로원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일본 국적을 취득했어요. 1년 반 뒤 일본 TV에서 그 스토리를 제작하기 위해 여기로 다시 왔어요. 방송 스태프와 양로원 직원과 함께요. 그런데 촬영이 끝나고 돌아가기 전날 할머니는 '일본에서 너무 괴롭다. 여기에 다시 살고 싶다. 나는 안 돌아가겠다'는 겁니다."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었을까요?
"한국에서 30~40년간 살았기에 그쪽에서 적응을 못 했어요. 입맛도 김치와 된장찌개에 익숙해졌지요. 자기가 동물원에 갇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거예요. 아사히신문에서는 일본에 되돌아갔던 이런 할머니들의 육성(肉聲)으로 '나의 조국은 냉정했다'라고 보도했어요."
―안 돌아가겠다는 147번 할머니는 어떻게 됐습니까?
"할머니에게 '다시 오실 수 있도록 해보겠다'며 겨우 달래 보냈습니다. 할머니는 떠나는 차창을 통해 '원장님 제발 제발'이라고 외쳤어요.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때 처음으로 내가 빈말을 했어요.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부용회(芙蓉會)' 친목 모임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1960년대에 들어서 이분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서울·대구·부산·목포 등 전국 도시마다 모임이 있었어요. 한때 서울에는 전국 회원들이 회비를 내서 구입한 '부용회' 건물이 있었어요. 갈 데 없는 할머니들이 거기서 합숙을 했어요."
―부산에는 아직도 부용회 모임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두 분만 남아 있을 겁니다. 회장인 구니다 후사코씨가 102살이 됐어요. 몇 년 전 '대구부용회 50년 행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일본에서 무용단이 오고, 주한 일본 대사관의 공사가 참석했어요. 그게 마지막 행사였어요. 대구부용회를 이끌던 회장은 재작년 우리 시설로 들어왔어요. 약간 치매 증세가 있어요."
―나자레원은 부용회와 연결돼 있었군요.
"문제가 생기면 우리 쪽에 연락이 왔어요. 형편이 몹시 어려운 부용회 회원들에게 약간의 돈을 부쳐주기도 했어요. 서울 회원들을 여기로 초청한 적도 있었고요. 이제는 다들 병석에 있거나 저세상으로 떠났어요."
―이들 할머니의 불행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었지요."
―이들은 결코 전쟁의 가담자가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당시 우리 사회와 남자들이 박해한 것이지요. '일본은 가해자'라는 명분 논리 때문에 드러내기 어려웠던 우리의 치부(恥部)였습니다.
"일본인들은 '내 동포가 불쌍하게 살 것'이라는 생각으로 여기에 와봅니다. 하지만 좋은 시설을 보고 놀랍니다. 할머니들에게 '일본에 안 가겠느냐?'고 물으면 '여기가 고향이고 내 터전'이라고 답합니다. 아사히신문에서 '이곳이 천국(天國)'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어요. 일본 입장에서는 나자레원 설립자의 선친이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했다는 걸 알면 기가 막힐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했어요. 이 할머니를 통해 일본에 한국의 사랑을 알리는 겁니다."
―일본에서 지원을 해줍니까?
"알아서 도와주면 고맙지, 일본에 절대 구차한 소리를 하지 않아요. 일본 총영사관은 일본 호적을 가진 할머니에 대해 '긴급구호' 형식으로 개인당 얼마씩 줍니다. 나자레원 직원은 다섯 명인데, 저는 봉급이 없어요. 여기서 숙식하고 당직을 합니다. 경제적 여유가 없기에 할머니들이 병석에 누우면 제가 간호하고, 돌아가시면 제가 시신을 다 닦고 염까지 했어요."
―국내 주류 언론에서는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위안부 할머니 문제와 연결이 안 됐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분들이 편안하게 지냈으면 합니다."
나자레원 1층에서 휠체어에 앉아 TV를 보던 홋카이도 출신의 할머니는 96세였다. 일본어로 말했다.
"가이큐주넨생(1920년생). 1957년부터 서울에서 혼자 살다가 2007년 들어왔지요. 남편은 전기기사였지. 나보다 일찍 죽었어요."
2층 휴게실 겸 식당에는 세 명이 앉아서 10원짜리 동전을 쌓아놓고 화투를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