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협업의 산물
“제가 천재라니요(웃음). 과찬입니다. 드라마는 협업의 산물이에요. 작가는 드라마의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죠. 작품의 분위기와 완성도는 현장에서 감독님이 어떻게 지도하고, 배우가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뛰어난 감독과 헌신적인 스태프,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없었으면 좋은 평을 받기 어려웠을 거예요.”
김은희 작가는 함께 일한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공을 돌렸다. 그는 성공의 단맛을 오래 머금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겁도 많고 반짝 즐기는 스타일”이라며 “최종회 방송을 볼 때도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나, 잘 쓴 건가, 좀 더 잘 써야 했는데… 라는 심정으로 고민하고 후회하고 반성했다”고 말했다.
〈시그널〉은 시청률 20%대에 진입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후속작이었다. 첫 방송부터 엄청난 중압감이 있었다. 방송국에서는 “시청률 관계없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의의를 두자”고 격려했지만 작가의 마음은 무거웠다.
“장르물이 작품성, 대중성, 흥행성의 접점을 찾기 어려워요. 사건에만 너무 치중하면 사람이 없어지고, 사람 이야기에만 몰두하면 장르의 특성이 약해지죠. 시청자들이 어떤 지점에서 재미를 느끼는지 잘 모르겠어요. 마치 연애하는 기분이에요. 열심히 하느라고 했는데,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그런 느낌이요.”
그의 ‘열심’은 통했다. 시청자들은 열렬한 호응으로 답했다. 시청률은 5%대에서 시작해 세 배 가까운 수치로 마감했다. 더 나아가 일부 연령대, 마니아층에서만 호소력이 있을 것 같았던 장르물도 치열한 경쟁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막장 드라마’가 우세한 방송 드라마 업계에서 다양한 소재, 주제의 작품이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과거로부터 걸려온 간절한 신호
〈시그널〉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과 함께 물신주의, 개인주의가 팽배해진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서 자란 범죄 중 해결되지 않은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드라마다. 어린이 유괴, 연쇄 살인, 권력층의 비리와 부유층 자녀의 범죄, 청소년 집단 성폭행 사건 등 모두 5개의 에피소드가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엮여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과거의 형사들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2015년 현재의 형사들이 해결한다. 과거의 형사들이 대부분 ‘감’과 ‘촉’에 의존한 수사에 익숙했다면, 현재의 형사들은 프로파일링(범죄심리 행동분석) 같은 수사기법을 활용해 사건을 해결한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재조명되기도 한다. 카드 빚 때문에 아이를 유괴한 여성 범죄자 이야기, 빈부 격차가 극심한 곳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불공정한 사회가 그려진다. ‘사악한 개인’을 만든 책임은 ‘부패한 사회 공동체’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에피소드를 쓸 때마다 제가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지 먼저 생각하고 이야기를 풀어요. 연쇄 살인 사건 편에서는 과거의 낙후된 수사 시스템에서 고군분투하는 형사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이재한(조진웅)이 그런 형사죠. 요즘은 CCTV, 블랙박스가 많이 설치되어 있고, 과학수사기법도 비약적으로 발달했어요. 15년 전 일어난 범행 현장에서 발견한 작은 혈흔으로 범인을 알아낼 정도죠. 과거엔 지금보다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 못했으니까, 수사가 더 힘들지 않았을까요. 이런 이유로 엉뚱하게 범인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도 있었고, 미제 사건도 생겼을 거예요. 희생된 분 중에 의로운 경찰도 있었고요. 그런 분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이재한 형사의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는 무전기다. 과거의 형사와 현재를 사는 프로파일러 박해영(이제훈)이 무전기로 교신하며 범죄를 해결한다.
“제가 드라마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죄를 지은 범인은 세월이 흘러도 꼭 단죄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처벌받지 않고 숨은 범죄자들이 자연사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공소시효는 없어져야 하고요. 사실 이 제도가 없어져도 미제 사건은 범인을 잡기 어려워요. 사건 현장도 훼손되고 증거도 없어지고 증인의 기억도 왜곡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공소시효란 제도로 인해 범인에게 안도감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유가족들에게 언젠가는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남겨줘야 하지 않을까요.”
‘희망’이란 단어를 꺼낸 뒤 김 작가가 잠시 말을 멈췄다. “드라마 기획 단계부터 유괴 사건을 빼자는 의견이 있었어요. 어린 자녀를 둔 시청자들이 TV에서 유괴 사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부모에게 자녀의 유괴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거든요. 그러나 실제 장기 미제 사건 가운데 유괴의 비중이 커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유괴 사건의 심각성을 환기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어요. 이 에피소드를 포기할 수 없었죠.”
그는 유가족의 고통을 보여주고 싶어 극중 유괴범에게 희생된 딸의 엄마가 범인이 잡힐 때까지 15년간 매일 경찰서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장면을 넣었다. “미제 사건은 내 가족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니까 잊을 수가 없는 거야. 하루하루가 지옥이지”라는 대사와 함께 그 장면은 시청자에게 기억되었다.
김 작가는 〈시그널〉 집필을 위해 2년간 준비했다.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수많은 미제 사건의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당시 사건 담당 형사, 강력계 형사, 프로파일러, 과학수사팀 수사관 등을 만나 생생한 현장 경험을 들었다.
“미제 사건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시민들의 제보라고 합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보여도 범죄와 관련해 알게 된 내용이 있다면 제보를 많이 해주세요.”
‘한국적 범죄 스릴러’ 장르 개척자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김은희 작가는 졸업 후 케이블 방송사의 FD로 일하며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SBS 공채 작가로 뽑히면서 구성작가가 되었다. 이때 만난 남편 장항준 감독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
“남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남편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흐름, 정치의 흐름, 세계 변화의 흐름을 꿰뚫을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고 이런 내용을 재밌게 이야기하는 기술이 있어요. 덕분에 세상을 보는 시각이 넓어졌어요. 드라마 대본도 쓰게 됐고요.”
김 작가는 2006년 영화 〈그해 여름〉의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했다. 2011년 법의학 드라마 〈싸인〉의 흥행으로 주목을 받았고, 2012년 국내 드라마 최초로 사이버 범죄를 주제로 한 드라마 〈유령〉이 호평을 받으면서 ‘한국형 스릴러’를 개척한 드라마 작가라는 칭호도 얻었다.
“저도 해외 범죄 드라마를 많이 보는데, 우리나라 상황과 많이 다르잖아요. 마약이나 총이 자주 나와요. 그 나라 문화에나 어울리는 소재죠.
늘 동시대 한국인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실제 있었던 사건, 사고에서 소재를 찾게 되죠. 가족 문제가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도 한국 스릴러의 특징이에요.”
드라마 작가로서 범죄 스릴러 분야를 새롭게 개척하고 있는 김 작가는 후배들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저는 드라마 작가 수업을 들은 적이 없어요.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글로 옮기는 훈련을 했어요. 대사는 기본이고 행동, 감정, 표정, 주변 배경 등을 지문 안에서 완벽하게 글로 표현하는 거예요. 50분 드라마 한 회 분량이 보통 A4 용지 42~49장 정도예요. 쓰는 과정도 힘들지만, 그것을 계속 고치는 작업도 만만치 않아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면 작가로 성공할 수 있어요. 꼭 특별한 사람만 글을 쓰는 건 아니니까요.”
그는 드라마의 수준은 결국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력에 달려 있다고 했다. 깊이 있는 인문학 책을 읽는 것은 기본이다. 영화를 보고 같이 관람한 이들과 토론한 뒤, 타인의 의견을 열심히 듣고 정리하는 훈련이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 때 자양분이 될 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