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부터 국내 백화점과 주요 쇼핑몰에서 한 달 수천 개씩 팔리며 화제를 모았던 가방이 있다. 국내 한 회사가 홍콩에서 수입해 판다는 '진저백(Ginger Bag)'이다. 만져 보면 일반 천 가방과 크게 다를 게 없지만 20만원 정도 하는 제법 비싼 가격에 팔렸다. 인기의 요인은 가방에 인쇄된 무늬에 있었다. 진저 백은 한 개 수천만원씩 하고, 그럼에도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몇 년씩 기다려야만 살 수 있다는 프랑스 회사 '에르메스' 가방인 '버킨 백'과 '켈리 백'을 놓고 사진을 찍은 다음, 그 사진을 자신들이 만든 천 가방이나 나일론 가방에 인쇄해서 찍어내는 전략을 택했다. 사진이 또렷하게 인쇄된 덕에, 비록 천 가방이지만 멀리서 보면 진짜 가죽으로 만들어진 버킨 백이나 켈리 백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른바 '페이크(fake)' 기법을 쓴 것이다.
에르메스 측은 이에 2014년 7월 진저백이 디자인을 침해했다고 법원에 소송을 냈고, 작년 2월에 있었던 1심과 지난 1월 열린 2심에서 연달아 승소했다. 재판부는 "소재가 다르다고 해도 멀리서 보면 소비자들이 버킨백과 켈리백, 진저백을 구별하기 어렵다. 이는 에르메스의 상당한 투자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과에 해당하는 제품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으로 부정 경쟁행위에 해당한다"면서 "해당 제품의 제조 및 판매를 중단하고 1억5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유사품 판 돈으로 진품 사는 사람들
짝퉁을 넘어 유사품도 이젠 철퇴를 맞게 됐다. 최근 재판부가 잇달아 유사품에도 죄를 묻는 판결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에르메스 대 진저백 판결 역시 디자인권 침해가 아닌 상표권 침해와 부정경쟁을 지적한 점에서 주목받는다. 버킨 백과 켈리 백은 각각 1984년 장 루이 뒤마(Dumas)가, 1935년 로베르 뒤마가 디자인한 제품으로 디자인권 존속기간(15년)이 넘어서는 제품이다. 디자인권만을 놓고 본다면 에르메스가 소송에서 이길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판부는 그러나 디자인권이 아니라 부정경쟁 방지법(널리 알려진 타인의 상표를 사용해 해당 상표의 식별력이나 명성을 손상시키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바탕으로 진저백이 '남의 성과를 무단으로 사용했다'고 판단했다.
최근 또 다른 화제의 소송은 16일 언론을 통해 알려진 서울중앙지법 판결이다. 프랑스 회사 '루이비통'의 로고를 제품 포장에 쓰고, 가게 이름을 '루이비통닥('LOUIS VUITON DAK')이라고 붙인 통닭집에 "간판, 광고, 포장지 등에 해당 로고를 쓰지 말고, 이를 위반할 때는 루이비통 측에 하루 50만원씩 지급해야 한다"고 재판부가 권고한 것. 그러나 이 가게가 나중에 띄어쓰기만 슬쩍 바꿔 '루이비 통닥(LOUISVUI TONDAK)'이라고 이름을 바꿔 쓰자 법원은 "해당 명칭을 쓰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1450만원을 강제 집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역시 부정경쟁 방지법을 적용해서 내린 결정이다. 이렇듯 재판부가 최근 상표를 무단으로 사용한 회사에 연달아 패소 판정을 내리자, 관련 업계도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다.
작년 7월 서울본부세관은 중국에서 몰래 들여온 가짜 유명상표 가방과 시계 등 8000여 점을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판매한 김모씨 등 2명을 상표법과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김씨 등은 각종 SNS에 진품처럼 보이는 가짜 가방이나 보석, 시계로 치장한 모습을 매일 '사진 일기'처럼 찍어 올리면서 제품을 홍보했고, 이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에겐 물건을 따로 카카오톡으로 흥정해서 팔다가 적발됐다. 세관 관계자는 "최근엔 오프라인으로 짝퉁을 파는 경우가 점점 줄고, SNS나 블로그를 통해 교묘하게 파는 경우가 많아 적발이 쉽지 않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또 "아예 똑같이 만들어 파는 경우는 차라리 잡기 쉽다. 조금 다르게 만들어 '짝퉁이 아니다'라고 단속을 피해나가는 경우는 더 어렵다"고 했다.
실제 몇몇 '명품 블로거'라고 불리는 이들은 SNS계정으로 쌓은 유명세를 이용해 짝퉁이나 유사품을 만들어 조용히 팔고 있다. 19일 '명품 블로거'라는 A씨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들어가 댓글로 사진 속에 그가 착용한 제품에 대한 문의를 해봤다. "언니, 그 가방 진짜예요, 아니면 A급이에요? 어떻게 파세요?"라고 묻자 10분쯤 뒤 A가 답을 보내왔다. "이탈리아 사피아노 가죽으로 만든 제품인데, 이건 짝퉁이 아니에요. 형태만 같을 뿐 로고도 없거든요. 짝퉁 싫어하는 우아한 언니들을 위한 디자인 제품이에요. 원하면 이름도 새겨줍니다. 실(絲)도 최고 등급을 썼어요. 현금으로 280만원 보내시면 됩니다."
재밌는 건 A가 한동안 이렇게 유사품을 만들어 팔면서도 버젓이 각종 해외 사치품을 파는 회사의 VIP 고객으로 초대돼 행사장에 드나들곤 했다는 것. 유사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진품을 샘플로 사들인 덕에 VIP 대접을 받는 아이러니가 생긴 것이다. 한 프랑스 회사 이사는 "몇몇 명품 블로거들이 우리 매장에 워낙 자주 찾아왔고 한꺼번에 많은 제품을 구입해 가기도 해서 이들을 한동안 주요 고객으로 모시고 대접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 대부분이 우리 회사 제품을 그대로 베끼거나 비슷하게 베낀 제품을 만들어 팔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그 이후로는 초대명단에서도 뺐고 '제품을 더 이상 팔지 말라'는 내용증명을 보내놓은 상태"라고 했다.
최근 법원의 잇단 판결은 이처럼 짝퉁 혹은 유사품이 팔리고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질까 염려해 오히려 소심하게 대응하던 패션회사들이 더욱 큰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고 있다. 가령 미국 디자이너 의류회사 '톰 브라운'은 한국에서 온라인 쇼핑몰 등을 통해 팔리는 각종 짝퉁에 대해 부정경쟁 방지법과 디자인권 침해 등을 근거로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고, 캐나다 의류 회사 '캐나다 구스' 역시 앞으로 한국 업체들이 제품 로고를 비슷하게 만들어 사용하거나, 비슷한 상표명을 붙인 제품을 만들어 팔 경우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캐나다 구스 측은 "2013년 한국의 몇몇 업체들이 '코리아 구스' 같은 비슷한 이름의 제품을 만든 것을 보고, 이들에게 '지식 재산권 침해행위 중지 요청서'를 보내 제품 생산을 중지시킨 적이 있다. 앞으로는 우리 제품의 로고나 상표명뿐 아니라 제품 디자인을 유사하게 베끼는 경우까지도 대응하려 한다"고 했다. 이탈리아 의류회사 '몽클레르'는 끊이지 않는 한국 업체들의 짝퉁 판매에 대응하다 지친 나머지, 올해부터는 아예 모든 제품 상표에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진품 여부를 바로 알 수 있는 태그를 붙이겠다고 밝혔다. 몽클레르 측은 "내용증명을 보내거나 소송을 하는 것만으로는 모조품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을 수 있다"면서 "제품이 진짜인지 아닌지 누구나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을 개발할 필요를 느꼈다"고 했다.
"창작의 자유 침해한다" 주장도
업계에선 대체적으로 "이번 기회에 한국이 '짝퉁과 유사품을 버젓이 파는 나라'라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면서 법원 판결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익명을 요구한 한 스위스 시계회사 간부는 "본사에선 여전히 한국 시장을 두고 '중국보다 가짜를 훨씬 더 세련되고 정교하게 만들어서 파는 나라'라고 생각하더라"면서 "이번 판결을 계기로 지식저작권 침해가 곧 죄라는 사실이 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몇몇 디자이너들은 그러나 이런 판결이 혹여 창작의 범위를 더욱 좁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항변한다. '플레이노모어'라는 가방회사를 운영하는 디자이너 김채연(36)씨는 최근 에르메스와 소송을 시작했다. 이 회사에서 만드는 가방 '샤이 걸'은 인조가죽 가방에 커다란 눈알 모양의 반짝이 장식을 붙인 것이다. 작년 에르메스 측이 ''플레이노모어'의 가방 형태가 '버킨 백'과 '켈리 백'을 그대로 베낀 것이니 제품 생산을 중단하라'는 내용증명을 보냈고, 이어 김채연씨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김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흔히들 명품 가방을 통해 신분과 재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나는 바로 그런 행태를 비틀어 '그저 재밌고 즐겁게 들 수 있는 가방'을 만들었다. 원자재가 고급이고 비싸다고 꼭 좋은 가방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디자인을 통해 알리고 싶었다. 우리 고객은 내 철학을 이해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내가 만든 가방과 에르메스를 혼동할 리가 없다"면서 "형태가 비슷하다고 무조건 '가짜'라고 주장한다면, 그 누가 기존 디자인을 패러디하고 또 오마주하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