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인‘일간베스트저장소’에 올라온‘운지벌레’(아래)와‘현무당벌레’(위)의 모습. 운지벌레에는‘일베’를 암시하는‘ㅇ’‘ㅂ’이 새겨져 있다.

서울 강북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 김모(53)씨는 한국과학창의재단(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책 기관)이 주최하는 '제34회 글로벌청소년과학탐구대회'에 학교 대표로 출전할 학생들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번 대회의 주제는 '식용(食用) 곤충'이었다. 학교 예선에 참가한 5~6학년 학생 12개팀 중 11개팀이 제출한 토론 자료가 '운지벌레'라는 처음 들어본 곤충에 관한 것이었다. 학생들이 제출한 자료엔 공통적으로 '운지벌레는 체내 50% 이상이 외상단백질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식용으로 적합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김씨는 한국식용곤충연구소(KEIL)에 전화를 걸어 운지벌레에 대해 문의했다가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최근 극우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인 일간베스트(일베) 회원이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비하하는 뜻으로 운지벌레라는 가짜 식용 곤충에 대한 정보를 만들어 인터넷에 올렸는데, 초등학생들이 대거 이 정보를 베껴 토론 자료로 냈다가 각 학교 예선에서 탈락했다는 것이다.

서울 지역 예선을 주관하는 서울과학전시관 박순엽 연구사는 "과학탐구대회는 지난해 서울 지역에서만 600개 초등학교 학생 3만6000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행사"라며 "아직 예선이 진행 중이라 정확한 피해 학생 수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수천명이 (일베 자료에) 속아 탈락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운지벌레 파문'은 각 초등학교 예선을 심사하던 교사들이 대회 주최 측인 한국과학창의재단에 이 같은 사실을 알리며 전모가 드러났다. 이 재단은 지난달 올해 대회의 초등학교 고학년 연구 주제로 '식용 곤충'을 지정했다. 그러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식용 곤충에 대해 알려 달라'는 초등학생들의 질문이 수백개 쏟아졌다. 이를 본 한 일베 회원이 지난달 20일 한 포털 사이트에 '곤충을 먹자'(Eat a Bug)라는 단체의 전직 부회장을 사칭해 '운지벌레'를 식용 벌레로 소개하는 글을 올렸다는 것이다.

과학계에 따르면 운지벌레는 실존하지 않는 곤충이다. '운지'라는 용어는 지난 2010년 한 네티즌이 드링크제인 '운지천' 광고에 노 전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한 동영상을 만든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사망을 비하하는 은어(隱語)가 됐다. 극우 성향 네티즌들은 만우절인 지난 1일에도 노 전 대통령의 이름 '무현'을 뒤집은 '현무당벌레'라는 이름의 가짜 식용 벌레 정보를 인터넷에 유포시켰다.

김재혁 한국과학창의재단 연구원은 "고민 없이 남의 정보를 그대로 베끼고 퍼트리는 학생이 많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