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정보까지 줄줄 꿴다
지난 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이투스교육 2018학년도 대입전략설명회'. 스타 강사가 일러주는 공부법을 들으러 체육관을 가득 메운 수천 명 학부모들 사이 백발의 노년 신사가 눈에 띄었다. 아들 내외, 고등학교 2학년 손자와 함께 온 김정식(가명·71·대치동)씨. 그는 고려대 법대 출신의 전직 고위 공무원이었다. 30년 넘게 강남에 살며 아들을 교육했고, 지금은 맞벌이 아들 내외 대신 손자 교육을 책임진다. 학원 픽업은 기본이고, 입시 정보도 챙긴다. "아들은 손자가 운동에 재능 있어 그쪽으로 키우고 싶어 하는데, 나는 공교육 루트를 잘 거쳐 좋은 대학에 입학했으면 해요. 그게 뜻대로 안 되면 미국 커뮤니티 칼리지(2년제 대학)에 진학시킨 다음 4년제 대학(university)으로 편입시킬 생각이죠. 이건 뭐 아들 두 번 키우는 기분이에요.(웃음)"
전직 교수로 대치동에서 20년 넘게 산 신기철(가명·64)씨는 맞벌이하는 딸 부부를 대신해 외손자가 다닐 영어 유치원 정보를 알아보고 있다. "딸 부부가 뚜렷한 교육 철학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내가 나섰어요."
'강남할배'는 '정보의 왕'이다. '더 테이블'이 '강남할배'를 대상으로 '교육에 참여하는 방식'을 조사한 결과, '학원 등 교육 정보를 알아본다'(33.33%)는 답이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교육비를 지원한다'(24.4%)와 '직접 키운다'(24.4%), '등하교를 돕는다'(15.15%) 순이었다.
지금 강남의 조부모 세대는 1980~ 1990년대 사교육 시장이 급팽창할 때 자식을 길렀던 '강남 부모 1세대'다. 자녀가 학창 시절 교육 정보를 구해봤던 경험이 있다는 얘기다. 조정숙 종로학원 수시전략연구소장은 "'학원1타 강사(해당 분야 최고 인기 강사)'를 불러 자식들 개인 과외를 시키기 시작했던 세대"라며 "사교육 경험이 있고, 경제력까지 있으니 손주 교육 투자에 더 적극적"이라고 했다. 최신 정보에도 빠르다. AI(인공지능)시대 교육법으로 인기 끄는 '코딩'을 가르치는 세실코딩 박상희 원장은 "언론에서 코딩 얘기가 많이 나오니 손주에게 코딩을 가르치고 싶다며 문의하는 '강남할배'들이 몇 분 계셨다"고 했다. 강남의 한 유학원 원장은 "유학을 경험했거나 외교관, 주재원 등으로 외국 생활을 한 고학력 해외파 노인들은 손자들이 마국 학년 기준으로 6~7학년이 되면 명문 보딩스쿨(기숙학교)에 보내기 위해 상담하러 온다"고 했다.
'할배 장학금'으로 발언권 커져
기업을 운영하는 정우식(가명·76)씨는 얼마 전 미국 동부의 명문 보딩스쿨에 다니는 손자를 보러 미국에 갔다. 바쁜 아들과 며느리 대신 손주 수업을 참관하기 위해서다. 임씨는 몇 해 전 손자가 유학을 준비할 때 유학원에 가서 직접 정보도 알아봤고, 교육비도 전액 책임지고 있다. 정씨는 "형편이 되는데 아낄 게 뭐가 있느냐"는 입장이다. 송영두 보스턴 유학원 대표는 "유학원 문의 10건에 2건 정도는 할아버지가 직접 나서는 경우이며, 그중 90%가 강남에 산다"고 했다. "자녀를 보딩스쿨에 유학 보내려면 1년에 최소 1억원은 들어요. 대개 10년은 지원해야 하니 10억원이 드는 셈이죠. 재산 규모가 100억원 이상 돼야 하는데, 40대에 그 정도 경제력을 지닌 부모는 거의 없어요." 유학 보내는 집 3분의 1은 '할아버지 장학금'이라고 한다.
교육비를 지원하니 '돈줄'인 할아버지들 입김이 클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사회의 경제 성장 구조 변화와도 연결된다. 60~80대 조부모 세대는 1970~1990년대 고도 성장을 배경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지금 30~40대 젊은 부모 세대는 장기 불황을 겪고 있어 자식 교육비가 부담스럽다. 자연히 경제력을 지닌 조부모에 교육비를 의존하는 가정이 늘었다.
시아버지로부터 쌍둥이 형제의 사립초등학교 교육비를 지원받는 주부 정유정(43·잠원동)씨는 "아버님한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니 애들 교육 얘기를 하시면 들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재력 있는 조부가 손주의 사교육에 관여하니 '격세(隔世)계급유전'이라는 말까지 나온다"고 했다.
성공의 기준이 다른 자식 세대와 갈등
사회 경험 많고 글로벌한 의식을 지닌 강남할배의 손주 교육 방식이 도움되기도 한다. 다국적 외국계 회사 임원이었던 방금석(74·서초동)씨는 축구 에이전트를 꿈꾸는 손주를 위해 영국에 직접 데려가 축구 학교를 견학하고 왔다. 딸 은주(46)씨는 "아버지는 법대, 의대보다 아이 적성에 맞는 직업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며 "세상 보는 틀이 넓으시니 아이도 할아버지 조언을 믿고 따른다"고 했다. 캐나다 워털루 대학교 공대로 손자를 유학 보낸 전직 공무원 박춘성(83·신원동)씨는 맞벌이 자식을 대신해 손자 교육을 도맡았다. 박씨는 "과외, 학원 한번 안 보내고 운동부터 한자 교육까지 시켰다. 자립심 길러주는 건 세상 오래 산 할아버지가 부모보다 낫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강남할배들의 지나친 관심은 자녀들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의사 출신 최준식(가명·78·청담동)씨는 손주들과 하는 주말 가족 식사 때마다 신문에 나온 주요 뉴스를 스크랩해 대화한다. 최씨는 논술에 도움이 되는 '할배표 공부법'이라 자부하지만 며느리 생각은 다르다. "제대로 대답 못하기라도 하면 그날은 설교 듣는 날이죠. 밥이 아니라 돌을 씹는 기분이에요. 전 그냥 자유롭게 키우고 싶은데."
사당동에 사는 정은영(40)씨는 금융업에 종사했던 시아버지가 아들을 강남에서 못 키운 걸 후회하며 손자는 강남에서 교육해야 한다고 종용해 스트레스를 받는다. "교대부속초 같은 명문 초등학교 정보를 다 찾아오셨더라고요. 시시콜콜 교육에 간섭하실 땐 월권(越權) 아닌가 싶어요. 아이 교육은 부모 권리인데." 정씨는 "시아버님 말씀을 안 따랐다가 나중에 아이가 좋은 학교에 못 가면 내 탓이 될 것 같아 고민"이라고 했다.
갈등의 초점은 '성공'에 대한 인식차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강남할배들은 교육이 성공의 지름길이란 인식을 갖고 있다. 성장 시대의 수혜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부모 세대는 자기 역량을 발휘하고 즐기는 교육을 추구하니 갭이 생긴다"고 했다. 고려대 김문조 교수도 "지금은 우리 사회 과잉 교육열이 꺾이는 시점"이라며 "학력이 성공의 전부가 아니란 인식이 커가는 상황에서 엘리트 교육의 유산에 갇힌 할아버지 세대와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는 젊은 부모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