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소리 끊이지 않는 영화 '곡성(哭聲)'의 배경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범죄를 다룬 영화 '곡성'은 주요 촬영 대부분을 전라남도 곡성에서 했다. 등장인물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것은 물론, 주인공이 일하는 파출소와 배경 곳곳에는 곡성이라는 지역명이 등장한다.
영화가 지역의 아름다운 경치와 이야기를 담으면 좋았을텐데 그렇지 못했다. 영화 '곡성'은 방화와 살인이 난무하고 칼부림과 피범벅이 마을을 뒤덮는 내용이다. 러닝 타임 내내 혼령이 떠돌 것 같은 스산한 분위기 속에 비가 내리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미쳐가거나 죽어 나간다. 영화 내용을 모른채 처음 촬영을 허가했던 마을 주민들은 영화 촬영 현장 곳곳에 분장팀과 미술팀이 칠해 놓은 피 범벅 분장에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진짜 곡성(谷城)이야기
전라남도 동북쪽에 위치한 군. 영화 대부분의 풍경은 이곳 전남 곡성에서 촬영했지만 실제로 곡성은 영화 속 음습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곳이다. 전라남도에서 산지가 가장 많고, 고도가 가장 높은 이 곳은 마을 자체의 자연이 크게 개발되지 않아 풍광이 뛰어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환경 덕분에 곡성은 현장감을 중요시 여기는 나홍진 감독에게 눈에 띌 수 있었다.
또한 영화 이름에서 쓴 한자는 '곡하는 소리'라는 뜻의 '哭聲'이었으나 실제로 곡성은 '谷城'이라는 한자를 쓰며, 골짜기가 많은 마을 이라는 뜻이다. 고려시대에는 한때 이곳을 지나가는 장사꾼들이 고개를 넘기가 너무 힘들어 영화 제목처럼 '哭聲' 한자어를 써서 곡성이라 부른 적도 있다. 하지만 수백년의 시간을 지난 현재에는 지금의 이름으로 정착했다.
2000년대 초반 부터는 지역 고유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활용한 '기차마을'과 세계의 진귀한 장미 품종을 한데 모아놓은 '세계 장미축제'을 지자체의 아이디어 관광 상품으로 개발했다. 또한 캠핑과 별자리 관측을 즐길 수 있는 곡성 섬진강 천문대까지 건립하면서 그야말로 낭만과 꽃과 별이 있는 고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사실 농지는 적고 군내에 공장이라고는 금호타이어 공장 하나 밖에 없을 정도로 산업 기반이 열악했던 이곳은, 1998년 전라선이 변경되면서 생긴 폐선로(廢線路)로 만든 기차마을이 조성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곡성읍 내 분지(盆地)를 지나는 전라선을 반듯하게 다시 깔고 나니 폐선 구간이 17.9㎞ 생긴 것이다.
곡성 기차마을
2012년 미국 CNN이 한국의 가볼만한 곳 50곳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한 '곡성 기차마을'은 친환경 관광자원을 기차로 둘러볼 수 있는 코스로 개발해 국내외 관광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는 곡성 대표적 관광지다. 하지만 기차마을이 처음부터 환영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1998년 폐선로를 활용해 관광자원화를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만 해도 대다수의 주민들이 "버려진 철도구간을 활용해봤자 사람들이 얼마나 오겠느냐"는 반응들이었다.
1999년부터 '관광객을 끌어들여 군민들의 살림살이에 도움을 주자'는 취지로 시작한 기차마을 사업은 폐선 구간에서 증기기관차를 달리게 하고, 레일바이크가 움직이도록 했다. 이곳에 카페, 펜션도 들여 관광객 입소문을 타게했다. 곡성군은 기차마을 사업을 전담하는 공무원 팀을 별도로 만들었고, 부족한 예산은 정부가 지원했다. 곡성 기차마을은 그렇게 곡성을 바깥세상에 알린 시발점이 됐다.
시큰둥한 반응 속에서 섬진강 기차마을이 본격 운영된 것은 2005년 3월. 폐선로에서 관광객을 태울 증기기관차, 전시용 증기기관차와 KTX열차, 기차카페 2량, 철로 자전거, 어린이 놀이시설을 갖추는 등 6년간 '준비 작업' 끝에 기차마을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본격 운영 3년 만에 기차마을은 '추억 속의 자연형 관광지'로 대박을 터뜨렸고,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세계 장미축제
곡성군 공무원과 군민들이 정성 들여 조성한 기차마을에 2011년부터 장미가 피어오르고 장미축제가 시작됐다. 약 1000종의 장미들을 한데 모아놓은 장미축제는 아름답고 다양한 꽃을 실컷 보고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화와 꽃을 연계해 만든 다양한 행사 프로그램도 볼 수 있다.
주변 지역에선 장미축제의 성공을 놓고 전남 22개 시·군 가운데 인구는 아래에서 둘째, 재정 자립도(7.44%)는 13위에 불과한 작은 지자체가 일궈낸 '작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장미축제장에서 직접 벌어들인 소득이 10억원을 넘고, 축제의 경제적 파급 효과는 그 열 곱절이 넘을 것이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다.
오지 중의 오지 가정마을
곡성에서도 오지(奧地) 중의 오지로 손꼽히는 곳이 고달면, 그중에서도 가정마을이다. 섬진강 건너 자리잡은 이 마을이 요즘 방문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캠핑과 래프팅, 하이킹을 즐기는 청소년, 어른들이 쉼없이 찾아온다.
가정마을은 영화 '곡성'을 촬영한 침곡마을에서 6㎞쯤 떨어져 있다. 곡성읍 기차마을 시작점에서 레일바이크나 증기기관차를 타면 침곡 앞을 지나 가정역에서 멈춘다. 이 역 앞 '출렁다리' 현수교 아래로 강물이 도도하게 흐른다. 출렁다리를 건너가면 가정마을 강변에 닿고, 탁 트인 푸른 잔디밭 캠핑장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캠핑을 즐기고자 한다면 텐트는 굳이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 특별히 사람이 몰리지 않는 한 캠핑장에서 텐트를 빌려주기 때문이다. 곡성군청소년야영장(시설)에선 110명까지 숙박할 수 있다. 최고 인기 프로그램은 여름철 즐길 수 있는 래프팅이다. 물 맑기로 이름 난 섬진강 물길 따라 압록까지 약 5㎞의 물살을 가르며 1시간 30분가량 래프팅을 즐길 수 있다.
곡성 섬진강 천문대
곡성섬진강천문대는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을 바라고 서 있다. 순하게 흘러드는 물줄기처럼 둥글둥글 참 유한 모습이다. 한데 여느 천문대와 달리 평지에 자리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게다가 주변으로 민가도 더러 눈에 띈다.
사실 이곳 곡성섬진강천문대가 들어서 있는 고달면 가정마을길 일대는 천문대가 들어서기에 그리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 천문관측을 위해서는 주변의 인공광원이 없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곡성섬진강천문대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건 천문대 측이 마을주민들과 불리한 여건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합심하여 노력한 덕이다. 우선 천문관측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마을과 도로에 설치된 가로등에 갓을 씌워 빛이 위로 향하지 못하게 했으며, 천문관측이 이뤄지는 시간대 도로를 지나는 마을 차량들은 스스로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끄고 지나기도 한다.
곡성(哭聲)과 곡성(谷城)의 윈윈 만남
장미 축제 첫날인 지난 20일 행사에서 노래를 부른 가수 '수와진'은 축제를 찾은 인파에 떠밀려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할 뻔했다. 곡성 주변은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곡성IC부터 창평IC까지 차량이 꼬리를 물었다. 29일 마감한 축제 방문객은 곡성 인구(3만600명)의 약 7배가 넘는다. 곡곡(曲曲)에 즐거운 비명이 메아리친 것이다. 곡성군의 관광객은 연간 126만명이 넘는다. 인구 3만 산골 마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수치이다.
올해엔 영화 '곡성'의 인기와 류근기 곡성 군수의 '기고글'도 한몫했다. 영화의 흉측한 이미지를 걱정하던 마을 사람들에게 발상의 전환을 강조하며 오히려 곡성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설득한 것이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다. 류 군수는 "영화 곡성이 대중의 관심속에 1500만 관객을 돌파해 금자탑을 쌓길 기원한다"며 "영화 속 공포를 즐긴 1500만 관객들이 우리 곡성에 오셔서 따뜻함이 주는 즐거움을 담아 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지역과 영화가 만나 시너지를 낸 사례는 곡성군 말고도 많다. '해운대', '파주', '밀양', '경주' 등의 영화는 지역의 이름을 영화명으로 사용하고 그 지역을 주요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시킨 작품들이다. 이 중 영화 해운대와 밀양 두 작품은 재난과 유괴 등의 소재를 다루고 있어 해당 지역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도 있는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영화 해운대는 부산시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으며 만든 덕분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으며, 영화 밀양은 칸에서의 수상과 함께 오히려 밀양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 전도연과 송강호는 밀양 명예시민이 되면서 홍보대사로 위촉되기도 했다.
곡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매체에서 지역을 어두운 소재로 활용했다 하더라도 이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지역의 이미지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