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도 아저씨도 아닌 '아재'
최근 성인 남성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아재'라는 단어가 자주 보인다. 2015년을 전후로 방송이나 SNS에서 자주 등장했고 2016년 현재, 관련 콘텐츠와 문화도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다음소프트가 SNS 상에서 '아재'라는 단어의 언급량을 분석한 결과, 2011년 1만8천390회 언급되었던 것이 지난해에는 48만3천186회를 기록해 27배 증가했다.
맥락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만 주로 30대 후반에서 50대까지의 중·장년층 남성을 가리키며, 이들이 젊었을 때 유행했던 패션이나 취향을 포괄하는 단어로 볼 수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아재'를 아저씨를 낮춰 부른 표준어라고 정의한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삼촌뻘의 남자 친척을 아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장년층 남성을 가리키던 '아저씨'라는 말이 있음에도 굳이 '아재'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아재, 웃기거나 멋있거나
사전적 정의와 친척에게 불렀던 경상도 방언이라는 점을 미뤄 보아 '아재'는 아저씨를 보다 친근감있고 정겹게 부르는 단어로 보인다. 오빠는 아니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낯선 아저씨보다는 가까운 관계를 가리키는 단어인 것이다.
최근 부는 '아재' 열풍에는 중·장년층을 친근하게 느끼는 시선이 담겨 있다. 대부분 유행이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을 희화화하는 표현으로 쓰이지만, 이 나이 또래만의 매력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경우도 있다.
아재 열풍의 선봉에는 아재개그가 있다. 시작은 MBC 예능 '마이리틀텔레비전'에 출연한 오세득 셰프였다. 그는 방송에서 시종일관 "양손으로 해야 양념" "대하(大蝦)철에는 대하(大河) 드라마를 틀죠" 같은 썰렁 멘트로 인기를 얻었다. 처음엔 '역시 아저씨'라며 흉을 봤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의 아재 개그에 세뇌된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개그맨들도 가세했다. tvN 코미디 프로에서 신동엽이 선보인 '아재 셜록'은 웃음을 자아냈다.
피해자 다이어리에서 '외롭다'는 단어를 본 신동엽은 "피해자는 싱글, 그러니까 범인의 이름은 벙글(싱글벙글)"이라며 진범을 붙잡는다. KBS 개그콘서트 '아재씨' 코너에서 박영진은 '아재 악령'으로 분했다. 10대 고등학생에게 빙의해 아재 개그를 펼치게 하는 역. '난닝구'를 입고 발가락 양말을 신은 박영진이 발가락 사이를 긁고 냄새를 맡는 장면에서 객석은 폭소를 터뜨렸다.
이와 더불어 인터넷상에서는 '휴먼아재체'라는 것이 있다. 느낌표, 말줄임표 등의 문장부호를 과도하게 사용하며 구수한 비속어를 함께 쓰는 것이 특징이다. 가수 임창정과 개그맨 정찬우가 대표적이다. 팬들의 야유에도 굴하지 않고 '휴먼아재체'로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은 온라인에서 여러번 화제가 됐다.
예전같으면 썰렁하다, 촌스럽다는 반응이 나왔을 것 같은 말장난과 말투들이 화제가 되는 것은 '아재'라는 키워드 때문이다. 과거에도 이런 류의 농담은 존재해왔지만 주로 '윗사람'이 회식 자리에서 거들먹거리며 웃음을 강요할 때 쓰여왔다.
하지만 '아재'들의 개그는 당연한 폭소를 기대하는 것이 아닌 반응이 안좋을 줄 알면서도 웃음을 갈구한다. 권위의식을 버린채 어설픈 유머를 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인터넷 용어를 따라잡지 못하지만 소통하려는 중·장년층 모습에서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아재가 어수룩한 표정으로 철 지난 개그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매력을 가진 중·장년 남성을 '아재파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예인 중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서른 이상의 남자 연예인과 20대 여자 연예인의 연애 보도가 많아지면서 '아재파탈'은 더욱 주목받는 단어가 됐다. 힙합 그룹 다이나믹 듀오의 최자와 그보다 14살 어린 설리, 그리고 11살 나이 차이를 극복한 가수 장기하와 아이유가 그렇다.
30대가 훨씬 넘는 남성들의 '아재파탈' 매력은 드라마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드라마 남녀 주인공 나이에 여자가 나이가 많은 연상 연하 커플이 줄고, 올 들어서는 삼촌 조카뻘 커플이 급증하고 있다. 현재 방영 중인 MBC 주말드라마 '옥중화'의 고수(38)와 진세연(22)은 열여섯 살 차이다. KBS 월화드라마 '동네변호사 조들호' 박신양(48)과 강소라(26)는 무려 스물두 살 차. SBS 수목드라마 '딴따라' 지성(39)과 혜리(22)는 열일곱 살 차이가 난다.
이에 대해 정석희 TV평론가는 "'태양의 후예' 송중기와 진구, tvN '또 오해영'의 에릭, KBS '아이가 다섯'의 안재욱처럼 성숙하고 속 깊은 남성 캐릭터에 대한 여성 시청자들의 갈증이 커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외모나 젊음이 아닌 연륜이나 경험을 토대로 상대를 배려하는 중·장년층 만의 매력이 시청자들에게 통했다고 보는 것이다.
아재, 자처하거나 극복하거나
'아재 열풍'을 받아들이는 남성들의 모습은 크게 두가지다. 아예 처음부터 유행에 뒤처짐을 인정하고 '아재'임을 자처하는 사람과 나는 아재가 아니며 여전히 젊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사람이 있다.
아재이길 자처하는 이들은 스스로가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하는 것을 인정하는 반면,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꼰대', '개저씨'가 되기보다 자신이 나이 많은 구세대임을 밝히고 이로 인한 우스개 소리와 농담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세련되게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조하기도 한다. 아예 젊은 세대들과 소통할 때 '나는 40대 아재입니다. 트렌드를 잘 몰라도 이해해주세요'라는 전제를 깔고 대화하기 시작한다. 비하의 대상인 '개저씨' 보다 친근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한 '아재' 이미지가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반면 '아재스러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라이프 스타일 전체를 바꾸려는 시도를 한다. 최신 트렌드에 뒤떨어진 사람을 희화화해 '아재'라고 부르는 것을 알고, '아재 탈출'을 꾀하는 경우다. 이들은 '아재'의 범주에 들지 않기 위해서 한물 지난 '아재 개그'를 하거나 중·장년층의 입맛·패션 취향인 '아재 입맛'이나 '아재 패션'을 고집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젊은 세대의 문화를 흡수하고, 자신의 연령에 맞게 적용시키려고 한다.
청바지처럼 젊은 사람들이 많이 입는 옷을 입고 출근하는 중년층이 눈에 띄는 것도 이런 노력 중의 하나다. 무역업체를 다니는 백모(29)씨는 "40대인 과장님이 청바지를 입고 왔는데, 유행이 한참 지난 폭이 넓은 청바지여서 한참 웃었다"며 "그래도 젊은 팀원들과 어울리려는 노력이 좋아 보였다"고 했다.
외국계 증권사 대표 출신으로 기업 투자 전문가인 김석헌(53)씨는 청바지 매니아다. 갖고 있는 청바지만 20여 개다. 대기업 임원인 김은(48)씨도 일주일에 두 번 청바지를 입고 출근한다. 회사가 '비즈니스 캐주얼'로 청바지를 허용하고 있어, 눈치 안 보고 입는다. 외국계 회사에서 정장만 입었던 강규연(가명·45)씨는 최근 국내 신용카드회사로 옮기면서 장롱 속에 묻어뒀던 청바지를 꺼내들었다. 그는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상 이렇게 안 입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 유학파 출신으로 현재 홍보대행사를 운영 중인 홍순언(48)씨는 청바지에 백팩을 메고 출근한다. "잠시 국회에서 일했던 시기를 빼고는 늘상 청바지를 즐겨 입었다"며 "작년에 체중이 90kg 넘을 정도로 살이 많이 쪘는데 청바지 입으려고 엄청난 다이어트를 했다"며 웃었다.
G마켓에 따르면 올해 40~50대 남성의 청바지 구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4배 이상 늘어났다. 모자가 달린 티셔츠는 세 배 가까이, 젊은 취향의 스니커즈 운동화도 판매량이 6배 늘었다. 인터넷에는 아이돌 이름 공부하기나 신조어 학습하기 같은 '아재 탈출 비법'이 많이 소개돼 있다.
그러나 '개저씨'나 '아재'가 되지 않으려 무리하게 젊은 취향을 흡수하다 보면 '쿨저씨'가 될 가능성도 있다. '쿨저씨'는 나이에 비해 젊게 입으려 애쓰고, 골프보다는 등산이나 걷기를 즐긴다고 얘기한다. 회식할 때 후배들이 수저를 자기 앞에 놓으면 "이런 것 네가 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직원들에게 "앉아 있지만 말고 빨리빨리 집에 들어가라"고도 한다. 하지만 무늬만 '쿨'할 뿐 정작 속마음과 진짜 하는 행동은 아저씨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아재'라는 단어와 함께 나타나고 있는 최근의 현상에는 소통을 위한 세대 간의 노력이 숨어있다. 구세대들을 친근하게 느끼고 이들의 장점을 매력으로 바라보는 젊은 세대와 자신들의 권위의식을 내려놓으면서 동시에 젊어지려는 중·장년층들의 노력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가부장과 위계질서 중심이었던 한국사회가 세대 간의 거리를 좁히고 수평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