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일본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쿠릴열도 남단 쿠나시르(일본 이름 구나시리·國後)섬 공항 터미널은 간이역 대합실 같았다. 지난 6일 70㎡(20여 평) 남짓한 터미널에는 북한 근로자 7명이 사할린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 길이라고 했다. 남색 점퍼와 낡은 운동화 차림이었다. 김일성 배지를 왼쪽 가슴에 단 근로자도 있었다. 그는 "여기 춥습네다. 날씨가 한심합네다"고 말했다.

러시아 정부는 올해 부두·도로·주택 같은 인프라 공사와 학교·병원·휴양시설을 짓는 섬 개발 공사를 본격 시작했다. 북한 근로자 30여명도 이 공사 현장에서 '외화 벌이'를 하고 있다. 또 다른 북한 근로자는 "1년 반 정도 일하고 중간에 한 번 고향 갑네다. 사할린에도 (북한 근로자가) 300명 정도 있습네다"라고 했다. "대개 3년 일정인데 체류 연장도 가능하다"고 했다.

이날 쿠나시르 방문은 한림대 러시아연구소 조사단 22명과 함께였다. 50명을 태운 소형 여객기가 공항 활주로에 멈춰 서자 러시아 국경수비대 소속 군인이 비행기로 올라왔다. 두 달 전 이미 방문 허가를 받았지만 경비대원은 "왜 왔느냐" "며칠 있나" 일일이 묻고는 일행의 여권을 모두 가져갔다. 군용 비행장으로 함께 쓰이는 멘델레예보 공항 검색대에서 방문자와 여권 사진을 다시 대조하는 '이중 검문'을 했다. 인근 군 훈련장에서 사격 소리가 잇달아 들렸다.

공항 터미널 청사를 나서자, 병풍처럼 험산(險山)이 늘어선 섬이 바다 건너 눈앞에 보였다.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다. "쿠나시르 해안 등대에서 탐조등을 켜면 홋카이도에서 그 불빛으로 신문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 있어요." 쿠릴열도 영유권 분쟁 전문가 최태강 한림대 러시아연구소장의 말이 실감 났다.

한림대 러시아연구소 조사단이 8일 러시아 쿠릴열도의 쿠나시르 섬 해안에 형성된 주상절리(柱狀節理)를 살펴보고 있다. 주상절리는 마그마가 급격하게 냉각 응고하면서 생기는 다각형 기둥 모양의 바위다.

섬 인구는 7800여명. 하지만 이 섬을 포함한 쿠릴열도는 오호츠크해와 태평양을 잇는 군사적 관문이다. 특히 쿠나시르와 이투루프 섬은 향후 러시아 핵미사일 잠수함의 정박이 가능하다. 수산업과 생태 관광 등 경제 잠재력도 크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의 바딤 슬랩첸코 한림대 연구교수는 "쿠나시르 섬은 화산·온천 같은 자연 자원을 지니고 있어 동북아 생태 관광의 메카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 섬의 골로브닌 화산에서는 한반도에서 볼 수 있는 눈잣나무와 가문비나무 같은 한대성(寒帶性) 침엽수들이 서식하고 있다. 현지 생태를 조사한 공우석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는 "쿠릴열도는 북방계 식물들의 보고(寶庫)이며, 한반도에 서식하는 식물들의 기원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러·일 양국은 1855년 시모다(下田) 조약 이후 쿠릴열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수차례 협약을 맺었다. 러·일전쟁과 2차 대전 이후 '전리품(戰利品)'으로 간주됐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 때는 승전국 일본이 영유권을 넘겨받았다. 1945년 2월 얄타회담 때는 미·영·소 연합국 3국이 "쿠릴열도를 소련에 양도한다"고 합의했다. 러·일 양국은 자국이 유리한 협상을 맺었던 시점을 기준으로 내세운다.

러시아와 일본의 속내는 다르다. 일본은 이투루프·쿠나시르·시코탄·하보마이 등 쿠릴열도 남쪽 4개 섬 반환을 요구하는 반면, 러시아는 시코탄과 하보마이 2개 섬은 돌려줄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최태강 소장은 "러시아가 쿠릴열도의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은 실효 지배를 강화하려는 '굳히기 전략'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쿠릴열도

러시아 캄차카 반도와 일본 홋카이도 사이에 있는 22개의 크고 작은 섬과 암초를 일컫는다. 사할린 동쪽에 있다. 이 가운데 이투루프·쿠나시르·시코탄·하보마이 등 남쪽 4개 섬이 러·일의 영유권 분쟁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