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현 문화부 차장

인문학은 흔히 '고요한 호수'에 비유된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비교하면 문사철(文史哲)에는 상대적으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 역사학계에 잔잔한 파문(波紋)이 일었다. 학술 계간지 역사비평의 봄·여름호를 통해 한국사 연구자 6명이 재야(在野) 사학계의 고대사 해석을 정면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이 역사적 고증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일부 국회의원과 진보적 지식인의 호응을 얻고 있다"는 취지였다. '사이비 역사학'이나 '역사 파시즘' 같은 격렬한 용어를 사용할 만큼 비판 강도도 꽤 높았다.

고대사와 현대사는 한국사의 두 지뢰밭이다. 그만큼 폭발성 강한 쟁점이 깔려 있다. 고대사의 대표적 쟁점 가운데 하나가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다. 기원전 108년 한(漢) 무제(武帝)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설치했던 낙랑군·진번군·임둔군·현도군이 한사군이다. 그중에서도 400년간 존속했던 낙랑군의 위치가 핵심 쟁점이다. 그동안 주류 역사학계는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재야 사학계가 '낙랑군은 요하(遼河) 서쪽에 있었으며 한반도 북부설(說)은 식민사학의 잔재'라고 공격하면서 논쟁이 촉발됐다. 이번 역사비평의 특집은 재야 사학계의 비판에 대한 주류 역사학계의 응답으로 볼 수 있다.

이번 논쟁에서는 흥미로운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우선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 연세대 박사과정 재학, 성균관대 박사과정 수료 같은 경력이나 직책이 보여주듯 기고한 학자가 대부분 30~40대 소장층이라는 사실이다. 주류 역사학계의 입장을 이어받은 '학문 후속 세대'가 이번 논쟁에 대거 뛰어들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또 하나는 고대사 논쟁에도 '공수(攻守) 교대' 조짐이 보인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재야 사학계가 공세적 태도였다면, 주류 사학계는 방어에 치중했다. 반면 이번 논쟁에서는 주류 사학계의 견해를 지지하는 젊은 학자들이 역공(逆攻)에 나섰다. 고대사의 칼자루를 쥔 이가 바뀐 셈이다.

사실 고대사에 과도한 민족 감정을 결부하는 건 시대착오적 측면이 있다. 고대사는 근대적 민족국가가 형성되기 이전 영역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5세기 앵글로색슨인의 브리튼섬 침공 이후에 성립됐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프랑스는 기원 전후에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앵글로색슨의 지배가 없었다면 영국은 영어 대신 켈트어(語)를 썼을 것이며, 라틴어의 영향이 없었다면 우아한 프랑스어는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학문을 진영 논리로만 바라보면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만 반복될 뿐이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세대교체 관점에서 사고할 때 비로소 흐름이 보이고 진전이 생긴다.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의 등장은 이런 의미에서도 반가운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