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남서부 쿠르스크 지역은 요즘 밀 수확 마무리가 한창이다. 밭 곳곳에 위치한 창고는 이미 수확한 밀 포대로 가득 찼는데도 농부들은 쉴 틈 없이 일하고 있다.
이 지역이 곡창지대가 된 것은 '흑토(체르노젬·chernozem)' 덕분이다. 흑토는 미생물 활동이 활발해 형성된 두터운 부식층을 지녀 '꿈의 농지'로 평가받는다. 밀이 잘려나가 검은 토양이 얼굴을 드러낸 경작지에서는 메밀, 아마, 콩 등 작물을 심기 위한 밑작업이 곧바로 이어졌다. 대대로 쿠르스크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제나디 디바빈씨는 "올해 봄여름은 덥고 습해 밀 경작에 최적의 조건이었다"며 "올해 1ha(헥타르)당 4500㎏ 정도 생산됐는데, 소련 시절에는 같은 크기 땅에서 1500~1700㎏ 정도 생산되는 게 최고였다"고 했다.
쿠르스크 지역뿐 아니라 이미 지난 7월 말부터 밀 수확을 시작한 흑해 연안 지역, 이번 달까지 작업을 계속할 시베리아 지역까지 밀 풍작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러시아 농가들은 부족한 저장 시설을 고려해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빨리 가장 많은 양을 수출할 수 있을지 고심 중이다.
밀 풍작을 바탕으로 러시아가 사상 처음으로 세계 최대 밀 수출국에 등극할 수 있다며 들썩이고 있다. 유가 하락과 루블화 약세는 가뜩이나 '밀 수출 1위국'에 올라선다고 기뻐하는 러시아에 밀 수출 순풍을 불어주고 있다. 현지 언론사 리아노보스티지는 "기록적인 작황과 대내외적 호재로 농업은 러시아의 몇 안 되는 지속적이고 활발한 성장세를 보이는 산업 분야가 됐다"며 "지금이 러시아 농업의 르네상스"라고 표현했다.
◇기후변화로 러시아 풍작, 서유럽 흉작
미국 농무부(USDA)는 러시아는 오는 2016/17 양곡연도(2016년 7월~2017년 6월)에 밀 3000만t을 수출해 지난해 밀 수출 1위였던 유럽연합(EU)을 앞지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러시아가 사상 처음으로 세계 최대 밀 수출국 지위에 오른다는 것이다. 반면 EU는 주요 밀 생산 국가인 프랑스의 밀 수확량이 급감하면서 역외 수출량이 지난 양곡연도의 3380만t에서 2700만t으로 21%나 감소할 전망이다.
러시아는 올봄 온화하고 비가 많이 내리는 날씨가 지속돼 밀 생산량이 증가했다. 이런 날씨는 전통적으로 러시아 밀 생산 중심지인 흑해 연안 지역뿐 아니라 볼가 강과 우랄 산맥 인근 중부 지역, 일부 시베리아 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농림부는 올해 러시아 전역에서 7300만t의 밀이 수확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해 생산량(6500만t)보다 12% 늘어난 것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지구온난화가 계속되면서 추위 탓에 밀 경작이 어려웠던 시베리아에서도 점점 더 많은 땅에서 밀 경작이 가능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반면 EU 중 최대 밀 생산국인 프랑스는 올 초 폭우가 계속되면서 밀 수확량이 급감했다. 프랑스 농산물 컨설팅업체 아그리텔에 따르면 프랑스의 밀 생산량은 지난해 4100만t에서 올해 2870만t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와 반대로 올봄 서유럽의 기상 악화는 독일·이탈리아 등 EU의 밀 생산 대국 전반에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EU의 밀 수확 부진에도 국제 밀 가격은 하락했다. 러시아뿐 아니라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등 러시아 인근 국가와 호주, 캐나다, 미국 등지의 밀 수확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유가 하락, 루블화 약세가 밀 수출엔 호재
러시아에 경기 침체를 몰고온 국제 유가 하락과 루블화 약세는 최근 오히려 밀 수출에 호재로 작용했다. 유가 하락에 따라 밀 수출의 주요 운송 수단인 선박의 운임은 크게 줄었다. 여기에 미 달러화 대비 러시아 루블화 환율이 2014년 전년에 비해 2배 이상 급등(화폐가치 하락)한 이후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달러 등 외화로 환산한 러시아산 밀 거래 가격은 하락했다. 러시아산 단백질 함유량 12.5% 밀을 기준으로 따져보면 수출 판매 가격이 2014년 12월 t당 258달러에서 2015년 5월 194달러, 2016년 5월 191달러까지 떨어졌다.
러시아산 밀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자 전통적으로 흑해를 통해 러시아 밀을 수입해온 중동, 북아프리카 등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미국·호주에서 밀을 주로 수입하던 중앙아프리카와 걸프 연안의 많은 나라가 점차 러시아산 밀 수입량을 늘리고 있다. 심지어 미국 이웃나라로 미국산 밀을 선호하던 멕시코, 남아프리카에서도 러시아산 밀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주로 미국산 밀을 수입하던 나이지리아는 지난해 러시아에서 밀 72만t을 수입했다. 예전보다 2배 이상 늘어난 물량이다. 주러 나이지리아 대사관 측은 "나이지리아 농촌 지역은 미국산 밀로 만든 제품을 살 경제적 여력이 없어 러시아 밀 수입량은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나이지리아에선 지난해 러시아산 밀이 미국산 밀보다 16% 저렴하게 판매됐다.
◇러시아, 밀 수출 관세 일시 폐지 추진
러시아의 밀 수출량은 2014/15 양곡연도(2014년 7월~2015년 6월) 2280만t에서 2015/16 양곡연도(2015년 7월~2016년 6월) 2550만t으로 늘었지만 루블화 가치 하락으로 밀 수출로 벌어들인 돈은 2014년 54억달러(약 6조300억원)에서 작년 39억달러(약 4조3563억원)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에 러시아 정부는 수출량 증가를 자국 농가의 실질적 이익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수출 관세를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 정부는 수출 밀에 대해 t당 통관 가격의 50%에서 5500루블을 제한 값(최소 1t당 10루블)을 수출 관세로 매긴다. 러시아 정부가 루블화 환율 급등으로 밀 수출이 폭증하자 지난해 국내 밀 가격 안정을 위해 도입한 조치였다. 이 때문에 밀 생산량 증가에 비해 수출량 증가가 더뎠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는 지난 2일 러시아 농업 진흥 회의에 참석해 "앞으로 2년간 밀에 부과되는 수출 관세를 철회하기로 했다"며 "국내 곡물 시장이 생산량 증가에 따른 추가적인 이익을 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