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간된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헤이북스)는 14개국 화폐 속 인물을 통해 본 세계 건국 역사 및 근현대사 이야기다. 책을 쓴 사람은 터키 언론사의 첫 한국 특파원이었던 알파고 시나씨(30)씨. 취재나 국제회의 참석, 여행 등으로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현지 화폐를 모으곤 했던 그는 단순한 수집을 넘어 화폐 인물의 삶과 당시 사회문화를 탐구했다. 이를 통해 미국, 라틴아메리카, 동아시아 등 여러 나라의 건국사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냈다.
14개국 화폐 속 인물로 본 세계 근현대사
“화폐를 모으면서 흥미로운 점을 하나 발견했어요. 화폐 속 인물들이 대부분 그 나라의 건국 영웅이거나 자유 독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요. 원래 정치, 문화, 역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들의 삶이 곧 그 나라 건국 역사라는 걸 알게 됐지요. 그 내용을 정리해 한 잡지에 칼럼 형식으로 연재하고 있었는데, 출판사 대표의 눈에 띄어 책으로 엮게 되었어요. 오랜 꿈이었던 ‘저자’가 된 것도 기쁘지만, 생애 첫 책을 한국어로 썼다는 게 무엇보다 특별한 경험으로 남을 것 같아요.”
한국 생활 13년 차에 접어든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책을 내게 된 과정과 소감을 소개했다. 그가 현재 소장하고 있는 화폐는 80여 종. 이 중에는 직접 방문해서 구한 것도 있고, 외국 여행 중 화폐 수집상을 통해 손에 넣은 것도 있다. 새로운 화폐를 만날 때마다 이 사람은 누구이며, 그 나라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공부하다 보니 그동안 정리한 자료만 해도 적지 않은 분량이다.
그는 이 방대한 이야기를 모아 ‘세계사’를 펴낼 계획이었지만 ‘책이 너무 두꺼워질 것 같아’ 국가 수도 줄였고, 200년간의 근현대사로 범위를 좁혔다. 또한 많은 인물 중 차별, 탄압, 독재에 맞서 시대를 변혁시킨 52명을 선별해 책에 담았다. 달러화로 본 미국의 탄생 과정을 시작으로 라틴아메리카(멕시코, 베네수엘라, 브라질), 남부 아시아(인도네시아, 인도, 파키스탄, 네팔), 중앙 서남아시아(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터키), 동아시아(일본, 대만, 중국)를 다루었고 부록으로 유로화에 대한 설명을 넣었다.
“유로화에는 특이하게 인물이 아니라 고전주의,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등 건축양식이 인쇄돼 있어요. 20개가 넘는 나라를 대표하는 통화인 만큼 동일한 공감대가 있어야 하는데 그 동질성을 건축에서 찾은 거죠. 그래서 지폐마다 들어 있는 각각 다른 가상의 건물을 통해 유럽의 한 시기를 대표하는 특징적인 건축 스타일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한국 화폐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점이에요. 자유, 독립, 건국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한국 화폐에서 해당 인물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느 나라든 시대에 당당히 맞선 건국 영웅들의 삶은 그 나라의 후세뿐 아니라 전 인류가 공유할 만한 정신적 유산”이라며, 그들의 이야기가 자신의 실제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 세상을 바꾼 그들의 도전정신에서 새로운 용기를 얻고,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화폐를 손으로 만지고 있으면 그 기운이 전해지는 느낌이라는 것. 또한 한국에 살면서 다양한 국적의 친구를 많이 갖게 된 것도 화폐 수집과 연구를 통해 얻은 중요한 소득이다. “그 나라 건국 영웅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금방 가까워진다”며 “대부분 자신의 나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외국인을 뜻밖의 장소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신기해하고 즐거워한다”고 덧붙였다.
기자, 방송인에서 코미디언까지 다양한 도전
그의 책을 관통하는 ‘도전’이라는 주제는 그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리 나이로 올해 서른인 그는 터키의 명문 과학고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공부하기 위해 12년 전 대전으로 왔다. 대학 입학을 위해 한국어 연수를 받던 중 자신의 적성이 과학기술보다는 인문사회 계열에 있음을 깨닫고 진로를 변경, 충남대 정치학과를 선택했다. 지금은 서울대 대학원(외교학) 석사과정 중이다. 2014년에는 대학원에서 만난 한국인 여자 친구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복잡한 국제 정세, 외교 문제 등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2010년 터키 내 최대 민영 통신사인 지한통신(Cihan news agency)에 입사해 한국에 주재하는 첫 터키 언론인이 되었다. 6년간 일하며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정세에 대한 기사를 주로 썼지만 최근 터키 정부의 언론 탄압으로 지한통신사가 강제 폐쇄되면서 해직 기자가 되었다. 그는 “이런 사태에 대비해 1년 전부터 ‘하베르코레(haberkore.com)’라는 뉴스 사이트를 만들었다”며 “터키 국민이 궁금해할 만한 한국 관련 소식을 비롯해 이웃 나라인 중국, 일본의 현안을 꾸준히 다루고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KBS 2TV 〈금요외신기자클럽〉, E채널 〈용감한 기자들〉 등에 출연하며 방송인으로도 활약 중이다. ‘외국 기자의 눈에 비친 한국인, 한국 문화’를 주제로 신문, 잡지에 글을 쓰고 강연도 한다. 최근에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스탠딩 코미디 공연도 했다.
“스탠딩 코미디는 아무도 안 하니까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한국에서는 스탠딩 코미디라는 장르를 찾기 어렵더라고요. 그게 제 도전의식을 자극했죠. 한국에 살면서, 한국 사람들은 못 느끼지만 외국인인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일들이 많았거든요. 기획부터 대본 작업, 마케팅, 대관, 공연까지 모두 혼자 했어요. 경험이 없으니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지만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자금을 마련했고, ‘안 웃기기만 해보라’고 타박하면서도 공연 마무리까지 함께 해준 아내의 도움 덕분에 무사히 공연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금요일, 토요일 이틀간 세 번 공연했는데 다행히 반응이 좋아서 자신감이 생겼어요. 대학 축제 같은 데서 불러주면 언제라도 달려가겠습니다(웃음).”
그는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라고 하지만 실제로 서로의 나라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다”며 웃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살면 살수록 정서적으로 두 나라가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는 사실에 놀란다”며 “알파고라는 이름 때문에 불편한 것 외엔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알파고는 그의 성으로 터키에서도 흔한 성은 아니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이 있던 때에는 그의 SNS 계정을 통해 ‘사이버 테러’ 수준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관공서나 기관에서 서류를 발급받을 때도 이름을 물어 알파고라고 답하면 ‘장난치지 말고 본명을 말해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며 억울해했다. 터키에서는 서양처럼 이름을 앞에 써 시나씨 알파고로 불리지만 한국에서는 한국식에 맞게 알파고 시나씨로 쓴다.
호기심 많고,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친 이 유쾌한 청년의 다음 계획은 보드게임을 만드는 것. 주사위를 던져 말을 이동하는 단순한 형식이지만 게임을 통해 외교, 군사, 경제 문제 등을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이미 고등학교 때 이와 비슷한 게임을 만들어 교내에 중독자(?)를 양산한 경험이 있다는 그는 “이 게임을 통해 많은 사람이 복잡한 국제 정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