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51) 와세다대 교수를 만나러 일본 도쿄에 도착했을 때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는 '불황 터널' 저자다. 한국의 경제지표를 비교 분석한 결과 '1990년대 일본식 장기 불황'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 행로도 경제 침체와 관계가 있다.

"미(美) 위스콘신대에서 박사를 한 뒤 1997년 귀국해 산업연구원에 취직하자 두 달 만에 IMF가 터졌습니다. 그게 아니었으면 일본에 올 일이 없었습니다. 이곳 생활 17년째로, 미국에서 학위를 한 한국인 학자로는 가장 오래 일본에 있는 셈입니다. 미국 유학 할 때는 우리와 다른 것이 보였는데, 일본에서는 우리와 비슷한 것이 보였습니다. 경제 데이터를 비교해보며 너무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992년 '버블(거품) 붕괴'로 촉발된 일본의 경제 추락은 2010년까지 길게 이어졌다. 그 기간 연평균 1인당 GDP 증가율은 0.6%에 머물렸고, 이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한다. 아베 총리 집권 이후 대규모 양적 완화 등 극약 처방을 써가며 탈출하고 있는 중이다.

"경제성장률·청년실업률·금리·물가상승률 등 한국의 경제지표를 보면 장기 불황 터널로 진입하던 일본과 닮았습니다. 특히 인구구조가 중요합니다.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층이 13.1%인데, 1992년 당시 일본이 그런 수치였습니다."

박상준 교수는 “한국 경제는 양질의 일자리를 단기간에 만들어낼 수 없다”고 말했다. 와세다 대학에서.

―'고령화'는 사회문제인데, 장기 불황의 주요 원인이 되는 겁니까?

"인구 감소 추세에 고령 인구 비중이 늘어나는 것은 결국 경제활동인구 감소를 말합니다. 한번은 도쿄에서 버스를 타니 '최근 손자·손녀를 사칭한 금융 사기가 빈번하니 그런 전화를 받으면 반드시 가족이나 경찰과 상담하라'는 노인 대상 안내 방송이 나왔습니다. 일본은 현재(2014년) 65세 이상 고령자가 25.9%입니다. 전체 인구의 4분의 1입니다. 고령화 속도가 급격한 한국 사회에서는 10년 뒤 이런 풍경을 맞게 될 겁니다."

―경제활동인구가 감소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감소해도 일자리가 없다는 게 더 문제가 아닐까요?

"한국의 전체 실업률은 일본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유독 청년실업률만 높습니다. 우리가 9%인데 일본은 5.7%입니다. 이보다 고용률을 비교해보면 실감이 납니다. 한국 20대는 57.9%, 일본은 74.7%가 돈을 벌고 있습니다."

―왜 우리 청년실업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겁니까?

"일본은 전체 취업자의 88%가 임금 근로자입니다. 자영업자 비율은 12%에 불과합니다. 반면 우리는 임금 근로자 비중이 74%입니다. 기업 취직을 원하는 젊은이들 입장에서 일자리가 적은 거죠. 일자리의 핵심은 대기업 같은 '좋은 일자리'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일자리 비율이 일본은 30:70, 우리는 12:88입니다. 대기업 일자리가 일본보다 훨씬 적은 셈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일자리 비율은 이전에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지금 청년 세대에게 문제가 됩니까?

"지금 청년 세대는 이전에 비해 대부분 고학력입니다. 욕구가 높아졌지만 좋은 일자리는 그만큼 늘지 않았습니다. 한정된 일자리에서 상당수가 탈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일본 젊은이들도 당연히 대기업 취업에 매달리겠지요?

"우리처럼 대기업에 못 들어가면 '2류(流) 인생'으로 떨어진다는 상실감은 없습니다. 일본의 중소기업 임금수준은 대기업의 80%인데, 우리나라는 50%가 겨우 넘습니다. 복지 수준은 훨씬 더 떨어질 겁니다. 대기업만 고집하는 우리 청년들을 탓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중소기업의 낮은 임금과 복지를 개선하는 게 청년 실업을 해소하는 한 방편이겠지만,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그렇게 올려줄 형편이 못 되는 현실이 있지 않을까요?

"우월한 갑(甲)의 위치에 있는 대기업과 대기업 노조가 마인드를 바꿔 중소기업들이 정당한 몫을 가져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대기업이 도와줘야 한다는 뜻은 뭡니까?

"한국은 2008~2010년 '리먼 쇼크'를 겪었을 때 환율이 올랐습니다. 당시 대기업은 수출하거나 외국 현지에서 생산해 국내로 들여오면서 엄청난 이익을 냈지만, 반면 원자재를 사와 1차 가공품을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은 허리를 졸라맸습니다. 일본 경단련(經團聯)처럼 한국 전경련도 중소기업과 공정한 이익 배분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과거 일본처럼 소비 위축에 따른 경제 침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 경단련은 소비 진작을 위해 임금 인상을 해달라는 정부의 요구도 적극 수용했습니다. 우리 대기업들도 일본의 경험에서 배워야 합니다."

―높은 인건비 부담은 고용 감소·글로벌 경쟁력 저하·경영 악화로 연결되지는 않을까요?

"우리 대기업의 부가 가치에서 인건비 비중은 48.3%입니다. 일본 대기업은 이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말하자면 임금 총액을 늘릴 여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한국에서 가장 어려운 집단은 기업이나 정부가 아니라 가계(家計)입니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GDP 대비 기업 소득은 수직 상승했지만, 가계소득 비중은 오히려 감소했습니다. 심지어 OECD 회원국의 1년 평균 노동시간이 1770시간인 데 비해 한국은 2124시간인데도 말입니다."

―반면 노동시간당 생산량은 거의 최하위로 나왔습니다. 일을 오래 하지만 실적은 별로 없는 격이라고 해야 할까요?

"정시 퇴근이 눈치 보이는 한국 기업 문화에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어차피 퇴근이 늦으니까 근무 시간에는 느슨하게 하는 겁니다. 아베 총리는 '야근이 많은 기업에 불이익을 주겠다'며 노동법 개정에 들어갔습니다. 야근이 많다는 것은 결혼·출산·육아 등 인구문제와 관계됩니다. 특히 여성 취업률에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한·일 35~39세 남성의 취업률은 90%대 초반으로 비슷한데, 여성 취업률에서는 한국 54.1%, 일본 68.3%입니다."

―우리나라도 정시 퇴근 문화가 정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예외가 많겠지만요.

"한·일의 연령대 사망률을 비교해보면 거의 비슷합니다. 다만 40·50대 한국 남성의 사망률만 일본보다 40%나 높습니다. 같은 연령대 여성 사망률은 차이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정확히 분석된 것은 아니지만 노동 스트레스와 가장(家長)으로서 부담이 작용한 게 아닌가 합니다."

―'회사인간(會社人間)' '과로사(過勞死)' 같은 용어는 일본에서 나왔습니다.

"10년 전부터 학부생들까지 '일과 생활의 밸런스'에 대해 논문을 썼습니다. 언론에서도 그런 토픽을 많이 다뤘고요. 일본의 비교 기준은 아시아가 아니라 독일·프랑스 등 유럽입니다. 자기들이 너무 일을 많이 하고 있음을 깨달은 겁니다."

―청년 실업 세대에게는 '일과 생활의 밸런스'는 다음 문제이고, 우선 일할 기회를 갖는 게 급선무가 아닐까요?

"불황 터널에 들어선 한국 경제는 청년들이 원하는 양질 일자리를 단기간에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해외 일자리에도 눈을 돌려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동 순방 뒤 그런 말을 하니까, 젊은이들은 '당신이나 가세요'라고 냉소했습니다.

"해외에서 공부할 기회가 훨씬 많아진 젊은이들은 왜 구직(求職)에서는 아버지 세대의 의식을 가지고 국내 직장을 고집하는지 의아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1990년대 일본식 장기 불황'을 따라가고 있다는데 그러면 답은 무엇입니까?

"경제 불황은 소비 침체→디플레이션→재고 증가→투자 부진의 악순환입니다. 재정 정책과 금융 정책으로 경기를 부양시키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2014년 부동산 경기 부양을 위해 주택 대출 요건을 완화한 정책에 대해선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그때 경기가 워낙 나빴습니다. 아마 차기 정권에서도 부동산을 통해 경기 부양책을 쓰려고 할 텐데요.

"부동산으로 경기를 부양시킬 수는 없을 겁니다. 일본에서도 집값 하락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집을 구입하는 것보다 월세를 선택합니다. 젊은층 인구가 줄어 집값이 더 이상 오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여전히 부동산을 최고의 투자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근까지도 서울 강남의 아파트 가격은 오르고 있다는군요.

"저도 그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2%대 성장률에 청년 실업률은 늘고 노동 인구가 줄기 시작하는데, 전 세계 사례에서 보듯 천정부지 부동산 가격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거품은 꺼질 겁니다."

―인구는 줄지만 1인 가구 증가로 주택 수요는 있지 않을까요? 작은 평수 아파트가 인기라고 하더군요.

"전반적인 부동산 가격은 떨어져도, 일본 도쿄의 23구(區)처럼 특정 지역에서는 오를 수 있습니다. 살 만한 곳에는 수요가 몰리고, 반면 빈집이 많이 생기는 지역이 생길 겁니다. 그런 곳은 치안이 나빠지고 가게가 철수하면서 슬럼화될 공산이 높습니다."

―주택 정책에 기대할 수 없다면, 경기 부양을 위해 현재의 금리(金利)를 더 낮춰야 할까요?

"1995년 일본 금리가 1.5%였는데, 우리가 지금 그 수준(1.25%)입니다. 일본은 아무리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유동성(流動性) 함정'을 겪었습니다. 일본 금리는 1999년부터 0이 됐고, 지금은 마이너스 금리입니다. 우리도 소비 진작을 위해 금리를 더 인하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지만, 그럴 경우 오히려 정책 수단이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정부가 부채 증가를 무릅쓰고 재정지출을 늘리는 방법뿐이군요.

"1990년대 장기 불황에 빠졌을 때 일본은 인구가 줄어드는데 도로와 주택 건설 등으로 경기 부양을 하려고 했습니다. 세수(稅收)는 한정됐는데 복지 등 사회보장성 지출을 늘렸습니다. 그런 정책 미스가 장기 불황의 원인이 됐습니다."

―재정지출 확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까?

"높은 성장률이나 무리한 부양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는 겁니다. 우리의 2%대 성장률을 받아들이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정한 관계를 어떻게 살리고 여성 취업률을 높일 수 있는지 등 내부 시스템 개혁에 예산을 써야 합니다. 다행히 일본보다 기업 부채비율과 금융권 부실에서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입니다."

헤어질 때도 비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