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전(棋戰)이 자꾸 사라진다. 바둑계 전체를 떠받치는 텃밭이자 프로 기사들의 운동장이 갈수록 황폐화돼 간다. 1년 주기를 지키며 정상 가동 중인 국내 종합 기전(개인전)은 현재 GS칼텍스배와 바둑왕전 단 2개뿐이다. 맥심배, 지지옥션배 등 출전 자격이 제한된 기전과 군소 대회를 모두 합해도 10개 안팎이다. 2000년대 진입 직전 절정기에 비하면 딱 절반 수준이다.

올해 한국 기단(棋壇)이 겪은 충격적 사건 중 하나는 국수전과 명인전 등 두 유서 깊은 타이틀전의 중단이었다. 1956년 첫 우승자 배출 후 반세기 동안 한국 바둑의 젖줄 역할을 해온 국수전은 스폰서와의 이견으로 8개월째 못 열리고 있다. 43기까지 진행된 명인전은 후원사가 지난봄 결별을 선언하고 떠났다.

지난 1월 박정환(오른쪽)과 조한승이 겨뤘던 제59기 국수전 도전기 최종국 모습. 올해는 대회가 열리지 않아 국내 최고(最古) 타이틀전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대형 기전으로 출범한 레츠런파크배도 위험하다. 매년 12월이 기점(起點)임에도 현재까지 감감소식이다. 여성 기전은 국수전이 중단 1년 만에 회생했으나 명인·기성전은 올해 못 열렸다. 이 같은 현상이 가속화된 것은 2년 전부터였다. 천원전, 물가정보배, 대주배 등이 잇달아 폐지됐다. 왕위전, 패왕전, 최고위전 등은 올드 팬들에겐 아득한 추억의 무대로 남았다.

기전 수 감축으로 인한 부작용은 하나둘이 아니다. 첫째, 팬들의 다양한 선택권이 대폭 줄었다. 한국기원은 "총예산 34억원의 대형 기전인 바둑리그로 주 시장이 옮겨온 셈"이란 입장이다. 하지만 바둑리그는 제한된 출전 기사들만 활동하는 단체전이다. 기전 떼죽음으로 다관왕을 가리는 즐거움이 사라졌고, 도전제나 토너먼트가 갖는 개인전만의 관전 재미도 자취를 감췄다.

둘째, 바둑리그의 과다 점유율로 주요 기사들의 주 전장이 속기(速棋)에 맞춰지면서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박정환의 잉씨배 석패를 비롯해 중국세에 밀리는 최근 현상이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한국과 달리 기전 다양성을 지키고 갑조리그서도 1인당 2시간 이상을 제공하며 기보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셋째는 '선수'이자 바둑계 핵심 구성원인 대다수 기사의 박탈감이다. 종합 기전 준우승 관록의 30대 A프로와 50대 K프로가 올해 소화한 공식전은 딱 한 판씩이다. 40대 L프로에게도 불과 두 판의 공식전 기회만 주어졌다. 2004년 전자랜드배 초대 챔프 김성룡 9단은 "올해 대국으로 올린 수입은 20만원이 전부"라며 허탈해했다. 지난해 전체 프로 기사 4명 중 3명꼴로 연간 대국료 수입이 1000만원 이하였는데 올해는 그 절반 유지도 어려울 전망이다.

기전은 바둑 시장에 상장된 상품(商品)이다. 인기가 있고 상품성이 높아지면 고객(스폰서)들이 저절로 몰려든다. 현대 비즈니스에선 고객들의 기호를 파악하고 그들과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는 마케팅 기법이 강조된다. 한국기원은 이 점에서 과연 최선을 다해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담 부서가 구성되는 듯하다가도 용두사미 되기 일쑤였다.

중국의 호황은 바둑에 대한 국가적 도움과 바둑계 자체의 안정적 시스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기사들의 의욕을 자극하고 기업의 호응으로 이어져 3박자가 척척 맞고 있다. 일본은 신문사 주최의 기전 운영 구조가 여전히 단단해 대형 기전들이 흔들림 없이 매년 열린다. 한국기원도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기전 확충에 놓고 전력투구에 나서야 한다. 기전의 씨가 말라가는 현상을 막지 못한다면 한국 바둑에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