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월 23일 낮 1시 7분쯤, 속초를 떠나 서울로 가던 여객기 안에서 "꽝" 하는 굉음이 터졌다. 기내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한 괴한이 "기수를 북으로 돌리라"며 사제 수류탄을 터뜨린 것이다. 난투극 과정에서 수습조종사 1명이 사망했지만, 비행기와 승객 65명을 평양으로 끌고 가려던 범인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기내의 보안승무원이 발사한 권총에 사살됐기 때문이다. 여객기는 긴급 출동한 공군 전투기의 유도를 받으며 고성군 해안 모래밭에 불시착했다(조선일보 1971년 1월 24일 자). 새해 벽두에 터진 대사건이었다. 여객기 내에 수류탄을 터뜨린 범행도 충격적이었지만, 더 놀라웠던 건 기내의 총격 사살이었다. 보안승무원은 목숨 걸고 돌진해 연속으로 8발이나 발사했다. 신문은 "위기일발의 순간에 승객들을 구출했다. 흡사 스릴러 영화의 주인공 같은 무용담"이라고 썼다.

여객기 납치범을 기내의 보안 요원이 권총으로 사살해 납북을 모면한 사건을 보도한 1971년 1월 24일자 조선일보 기사와 1993년 12월 기내 범죄 제압을 위해 무술 훈련을 받는 스튜어디스들의 보도 사진.

[근육의 자율적인 통제를 붕괴시키는 테이저건은? ]

건장한 무장 요원이 권총을 차고 여객기마다 탑승해 돌발 범죄에 대처했던 '항공보안관'의 시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이어졌다. 이 무지막지한 시스템을 도입하게 한 건 1969년 12월 11일 터진 KAL기 납북 사건이었다. 강릉을 떠났던 국내선 여객기가 고정간첩에 의해 납치돼 원산에 착륙했다. 북한은 승객 중 39명을 돌려보냈지만 11명은 아직도 송환하지 않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납북사건 발발 이틀 뒤 '여객기마다 무장 승무원을 탑승토록 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처음엔 현직 경찰관을 탑승시키다가 나중엔 항공사가 채용한 요원에게 정부가 청원경찰 자격을 부여했다. '국정 농단' 최순실의 전남편 정윤회씨도 1980년대에 대한항공의 보안승무원으로 일했다.

무술 유단자에 명사수들인 보안승무원의 첫 번째 임무는 여객기 납북 방지였다. 당시의 표현을 빌리면 '북괴의 만행이 그 푸른 하늘에까지 뻗친 것을 분쇄'하는 일이었다. 비행 내내 그들은 객실에서 이동하는 물체와 승객의 동태를 조용히 살폈다. 여러 가지 돌발 상황에도 대처했다. 1974년 5월 국제선 기내의 화재 때 제일 먼저 소화기를 들고 달려간 사람도, 1983년 1월 여객기 폭파 협박 사건 때 기내에 탑승하고 있던 용의자를 체포한 사람도 보안승무원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가물에 콩 나듯 일어났다. 대부분의 비행시간은 '오늘도 이상 없음'으로 끝났다. 어떤 보안관은 비행 중 졸기도 했다.

결국 보안승무원 제도는 1994년 6월 폐지됐다. 오늘날엔 기내식을 서비스하던 객실 승무원들, 특히 남자 승무원이 유사시 보안승무원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최근 대한항공 기내에서 벌어진 중소기업 사장 아들의 난동을 승무원들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한 일은 대표적 사례다.

이 사건 이후 '옛 보안승무원을 부활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이제는 민간 여객기 안에 권총 찬 남자가 눈을 부릅뜨고 있을 필요까지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건 동영상 속에서 반미치광이처럼 날뛰는 범인을 향해 장전되지도 않은 테이저건을 겨누고 있는 스튜어디스의 가냘픈 팔뚝을 보노라면 한심하다 못해 어이가 없다. 항공 안전을 위협하는 기내 난동이 한 해 수백 건에 이르는 이상, 범법행위 발생 즉시 본때를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전문가들이 어떤 형태로든 기내에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