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대표 지성'인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Bauman·92)이 지난 9일(현지 시각) 영국 리즈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바우만과 교유하며 학문적 영향을 받은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가 그의 삶과 학문을 추억하는 기고를 싣는다.

한 전기 작가에 따르면,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가장 흥미롭고 영향력 있는 논평자 중 한 사람'이다. 사회학자, 철학자, 문명비평가로서 그가 우리에게 던진 말과 글은 깊은 울림과 미세한 떨림의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의도적이라 느껴지는 강한 슬라브 악센트의 말이나 문법을 뛰어넘어 시적(詩的) 경지에 도달한 그의 글은 형식부터 신선한 충격이었다. 먼저 작고한 첫 아내 야니나는 그의 영어가 약해서 그렇다고 조크를 던졌지만, 모국어인 폴란드어 문체도 그렇다 보니 사회학적 상상력을 시적인 차원으로 미학화하는 것도 나름 의도한 바였을 것이다.

바우만의 걸어온 삶의 궤적을 좇다 보면, 그만의 독특한 사유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계 지식인으로 살아온 개인사와 근대의 충격을 아무런 완충장치 없이 온몸으로 받아야만 했던 폴란드 현대사가 조우해서 빚어낸 역사적 비극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비극적 역사가 창조적 지성과 지적 생산성의 모태였던 것이다.

폴란드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의 성채인 포즈난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나치가 침공하자 소련으로 탈주해 스탈린주의자들이 결성한 '인민 폴란드군(armia ludowa)'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바르샤바대학의 사회학과에서 '인간적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적 이론가 호흐펠트 교수를 사사하고 사회학과 최연소 교수로 재직했다. 1968년 폴란드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주의 캠페인의 표적이 되어 쫓겨난 후 이스라엘로 이주했지만 1년 만에 다시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남기고 영국으로 이주하여 리즈대학에서 은퇴했다. 이 같은 그의 여정은 그 신산함만큼이나 지적 흥분과 모험의 흔적들을 드러낸다.

바우만은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세간의 평가에 불편해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바우만은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우리네 삶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포스트모던'한 역사적 조건들에 대한 해석자였던 것이다. 자본과 노동의 단단한 결합이 해체되면서 벌어지는 포스트모던한 현상들을 그는 '액체적 근대'라 명명했다.

예컨대 프롤레타리아조차도 될 수 없는 '언더클래스'에 대한 그의 통찰은 노동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며,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테제를 한 걸음 더 밀고 나아간 홀로코스트에 대한 '악(惡)의 합리성' 테제는 국가 권력과 근대성, 대량 학살에 대한 민중의 공범성 문제들을 제기했다.

내가 제기한 '대중 독재'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테제도 바우만이 던진 '근대성과 홀로코스트' '세습적 희생자의식'의 통찰력에서 힘입은 바 크다. 한국과는 멀리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바우만의 역사적 경험과 사유가 '대중 독재'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통해 한국 사회의 지적 논쟁에 개입했다는 사실 자체가 지구화 시대 포스트모던적 조건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멀리 서울에서 바우만의 영전에 보드카 한 잔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