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최규민 특파원

크리스마스를 앞둔 지난달 23일 싱가포르 마리나베이 샌즈 카지노는 초저녁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베이프론트 지하철역과 맞닿은 카지노 입구는 외국인용과 내국인용으로 구분돼 있는데, 외국인 쪽에는 여권을 손에 쥔 입장객들이 꽤 길게 줄을 늘어선 반면 내국인 쪽은 한산했다. 축구장 두 개 넓이인 1만5000㎡ 면적의 카지노 안에서는 수백 대의 슬롯머신과 게임 테이블 앞에서 대부분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도박에 열중하고 있었다. 중국인으로 보이는 한 50대 남녀는 룰렛 테이블에서 각자 500달러를 칩으로 바꾼 뒤 5분 만에 모두 잃고 자리를 떴다.

일본 의회가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복합 카지노 리조트 신설을 허용하는 법안을 지난달 통과시킨 후 싱가포르 카지노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교도통신은 "법안 통과에 앞서 일본 공무원들이 싱가포르의 사례를 면밀히 연구해왔다"고 전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지난 2014년 싱가포르의 카지노 두 곳을 둘러본 뒤 "복합 리조트가 일본 경제 성장에 핵심 전략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싱가포르가 촉발한 아시아 카지노 열풍에 막차로 올라탄 국가다. 이미 한국·호주·필리핀·베트남 같은 아시아 태평양 국가가 싱가포르를 좇아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가는 복합 카지노 리조트 건설에 열중하고 있다. 하지만 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는 반면, 최대 고객인 중국 도박꾼들의 발길은 뜸해지면서 카지노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지던 시절은 이미 저물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황금알 낳는 거위" 싱가포르가 촉발한 아시아 카지노 전쟁

요즘 아시아에서는 적게는 수천억에서 많게는 수조원이 투입된 대형 카지노 건설 프로젝트가 한창이다. 한국에서는 올해 4월 영종도에서 개장하는 파라다이스 시티를 비롯해 인천과 제주에서 4개의 대형 복합 리조트가 2020년까지 차례로 문을 열 예정이다. 베트남에서는 중국 국경 지역과 맞닿은 꽝닌성 등 3곳에서 복합 카지노 리조트가 건설되고 있다. 필리핀은 수도 마닐라에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모방한 '엔터테인먼트 시티'를 조성해 동남아 최대의 카지노 국가가 되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24억달러가 투입된 오카다 마닐라가 지난달 가개장하는 등 대형 복합 카지노 리조트가 최근 문을 열었거나 몇 년 안에 줄줄이 개장을 앞두고 있다. 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 같은 아시아 저개발 국가도 카지노 건설에 열을 올리고 있다. 태평양으로 눈을 돌리면 호주와 남태평양의 사이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도 비슷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싱가포르 본섬(오른쪽 위)에서‘센토사 게이트웨이’다리를 건너면 센토사 섬의 복합 카지노 리조트(왼쪽 아래)가 펼쳐진다. 싱가포르는 과거에 도박을 엄격하게 금지했지만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2005년 센토사 섬과 마리나베이 등 두 곳에 대형 복합 카지노 리조트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두 리조트가 만들어진 후 싱가포르 관광객은 500만명 가까이 늘었다.

도박을 엄격하게 금했던 아시아 국가들의 태도가 달라진 계기는 싱가포르의 성공 사례를 목격하고부터다. 싱가포르 역시 리콴유 전 총리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카지노에 부정적이었던 나라다. 하지만 아시아가 금융 위기 경기 침체에 빠지자 2005년 센토사 섬과 마리나베이 등 두 곳의 금싸라기 땅에 대형 복합 카지노 리조트를 개발하기로 입장을 바꿨다. 반대 여론이 들끓는 상황에서 싱가포르 정부가 감행한 도박이었다. 싱가포르 정부가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내세운 전략은 ▲카지노는 호텔·전시장·놀이시설 등을 갖춘 복합 리조트 중 일부로 제한한다 ▲내국인의 출입은 최대한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료로 카지노 입장이 가능한 외국인과 달리 싱가포르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카지노에 입장하려면 하루 100달러, 연간 2000달러를 내야 한다. 또 정부 보조금을 받거나 아파트 임차료를 못 내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자동으로 출입 정지 명단에 오르고, 본인이나 가족이 출입 정지를 신청할 수도 있다. 내국인을 상대로 한 광고나 판촉 활동은 일절 금지되고, 카지노 범죄 수사대가 사채업자나 불법 추심업자를 집중 감시한다.

이를 통해 싱가포르는 카지노의 경제적 효과는 극대화하면서도 이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은 억제하는 드문 사례가 됐다. 마리나베이 샌즈와 리조트월드 센토사가 2010년 개장한 뒤 싱가포르를 찾는 관광객은 968만명(2009년)에서 1450만명(2012년)으로 늘었고, 4만여 개의 새로운 일자리와 매년 10억싱가포르달러(약 8000억원) 안팎의 세수(稅收)가 창출됐다. '삭막한 권위주의 국가'라는 기존 국가 이미지를 '역동적이고 활기찬 국가'로 바꾸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반면 도박 중독, 범죄 증가, 생산성 하락, 가정 파탄 등 카지노로 인한 부작용은 당초 우려했던 것만큼 크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카지노규제청(CRA)은 "개장 이후 3년간 카지노를 한 번이라도 방문한 내국인(시민권자 및 영주권자)은 전체 내국인의 7.7%에 그쳤고, 내국인 방문자 수도 2010년 하루 평균 2만명에서 2012년 1만7000명으로 감소했다"고 밝혔다. 싱가포르 도박문제위원회(NCPG)가 조사하는 도박중독자 비율도 큰 변화가 없다. '돈은 국내로, 부작용은 해외로' 돌리는 싱가포르식 카지노 전략이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카지노, 좋은 시절 머지않아 지나간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성공 전략을 모방한 카지노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중국 정부의 부정부패 단속 강화로 카지노 최대 고객인 중국 도박꾼들을 유치하는 일도 어려워졌다. 지난 3분기 마리나베이 샌즈 카지노의 VIP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30% 줄었다. 매출 감소로 재정난을 겪고 있는 리조트월드 센토사는 지난 9월 직원 400명을 감원했다. 그나마 싱가포르 복합리조트는 카지노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은 편이라 불황에도 선방하는 편이다. 세계 최대 도박 도시이자 카지노 비중이 높은 마카오는 2013년에 비해 카지노 총매출이 40%가량 급감했다.

한편으로는 언론이 자유롭지 않은 싱가포르의 특성상 카지노로 인한 부작용이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집값을 못 내거나 대출을 못 갚는 등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카지노 블랙리스트(출입 정지 대상)에 올라 있는 싱가포르 국민은 4만7000여명으로, 전체 내국인(약 400만명)의 1%가 넘는다. 본인 또는 가족이 자발적으로 출입 정지를 신청한 사람까지 합치면 7만명에 이른다. 카지노 개장 이후 싱가포르 내 전당포 숫자는 2008년 114개에서 2014년 214개로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