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혜의 수요역사탐구―이순신리더십①을 읽고
지난 1월 4일 자 조선일보 A29면 '이순신 리더십'에서, 소설가 송우혜씨가 '서애(류성룡)의 이순신 수사 천거' 사실을 포함한 이순신에 대한 '징비록'의 기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한 것은, 사료(史料)의 섭렵과 해석에 문제가 있다. 그는 선조 24년(1591) 2월의 실록을 인용하면서 '서애는 선조의 명에 따라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배정했을 뿐이라'고 했는데, 이는 "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지만 성품이 지혜가 적은 듯하다"고 말할 정도로 이순신에 대해 잘 몰랐던 선조의 자의적 발탁보다는 이조판서 겸 우의정인 서애의 천거로 보아야 한다. 이 사실은 이순신의 죄를 논하는 선조 30년(1597) 1월 27일 실록을 보면 더욱 명확하다. 천거자의 연대 처벌이 우려됨에도 서애는 "내가 이순신을 수사로 천거했다"고 감연히 답하였다. 서애가 이순신을 천거하고 후원했다는 기록은 택당 이식의 '이통제사 시장'과 잠곡 김육의 '이충무공 신도비명'을 비롯해 허균, 신경, 이긍익, 이유원 등의 글에 당파를 초월하여 넘치고 있다. '징비록'과 '난중일기'를 보면 '누가 천거했느냐'를 논란한다는 것은 후학으로서 부끄러운 일일 만큼 두 분의 관계는 숭고하고 돈독했다. 송우혜씨의 납득할 수 없는 주장으로 인해 두 분의 위대한 만남과 '징비록'의 역사적 가치가 훼손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서애가 이순신을 천거하였다는 기록들(보충설명 자료)〉
송우혜씨는 2017년 1월 4일 첫번째 기고문에서 이순신이 '출세가 늦은 초라한 무장'이 아니라 '선조가 알아본 구국의 재목'이며, "류성룡은 선조의 지시에 따라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배정했을 뿐"이라는 등 서애선생이 이순신을 추천했다는 「징비록」의 기록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는데, 이는 1591년(선조24) 2월 전라좌수사 발탁 당시의 선조실록 기사에 서애선생의 천거라는 명시가 없는 반면, 그 2년 전에 정언신과 이산해가 이순신을 천거했다는(이때의 추천은 구체적인 보직 명시가 없는 천거였다) 기사와 선조의 지시는 있다는 것을 판단 근거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애선생이 이순신을 천거했다는 기록은 다른 여러 곳에 존재한다.
첫째, 서애연보 1591년(선조24) 2월조에 “형조정랑 권율을 천거하여 의주목사로 삼고, 정읍현감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라좌수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둘째, 「선조실록」의 1597년 1월 27일자에 나오는 두개의 기사로서, 선조가 이순신을 죄로 다스리기로 작심을 하고 하루에 두 번 개최한 회의에서 서애선생은 자신이 이순신을 조산만호와 수사에 천거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 회의에는 송우혜씨가 “임란 3년 전에 이순신을 천거했다”는 이산해도 참석하였으나 이산해는 서애선생이 “내가 이순신을 수사로 천거했다”고 했음에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선조 또한 송우혜씨의 주장처럼 자신이 이순신을 천거했다면 서애선생이 이순신을 천거했다고 한데 대해 의아해 했을 것이다. 선조가 회의 초반에 “영상(서애선생)이 이 자리에 있지만---이순신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유독 서애선생을 거명한 것은 서애선생이 이순신을 천거하는 등 후원자임을 다분히 의식한 말로 보인다. 이순신을 죽이려고 서슬이 시퍼런 선조 앞에서 “내가 추천했다”고 자진해서 말한 것 자체가 「징비록」의 기사가 사실임을 증명한다.
①선조실록 84권, 선조 30년 1월 27일 무오 1번째기사,1597년
수군을 강화하는 것에 대해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과 논의하다
상이 이르기를,---영상(領相,서애선생)이 이 자리에 있지만---비록 그(이순신)의 손으로 청정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그 죄는 용서해 줄 수 없다."
하니, 류성룡이 아뢰기를,"이순신은 한동네 사람이어서 신이 어려서부터 아는데, 직무를 잘 수행할 자라 여겼습니다. 그는 평일에 대장(大將)이 되기를 희망하였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글을 잘 아는가?"하니, 류성룡이 아뢰기를,"성품이 강의(强毅)하여 남에게 굽힐 줄을 모르는데, 신이 수사(水使)로 천거하여 임진년에 공을 세워 정헌(正憲)까지 이르렀으니---
②선조실록 84권, 선조 30년 1월 27일 무오 3번째기사 1597년
수군의 작전 통제권을 가지고 대신들과 논의하다
상이 이르기를,"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지만 성품이 지혜가 적은 듯하다. 임진년 이후에 한 번도 거사를 하지 않았고, 이번 일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니 법을 범한 사람을 어찌 매번 용서할 것인가.--- 왜영을 불태운 일도 김난서(金鸞瑞)와 안위(安衛)가 몰래 약속하여 했다고 하는데, 이순신은 자기가 계책을 세워 한 것처럼 하니 나는 매우 온당치 않게 여긴다. 그런 사람은 비록 청정(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하였다. 이산해가 아뢰기를,"임진년에 원균의 공로가 많았다고 합니다."--- 류성룡이 아뢰기를,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경성(京城)사람인가?"하니, 류성룡이 아뢰기를,"그렇습니다. 성종(成宗) 때 사람 이거(李琚)의 자손인데, 직사(職事)를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당초에 신이 조산 만호(造山萬戶)로 천거했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글을 잘하는 사람인가?"하니, 류성룡이 아뢰기를,"그렇습니다.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水使)로 천거했습니다.
셋째, 서인들이 찬술한 「선조수정실록」의 1589년 12월의 이순신이 정읍현감(종6품)에 임명된(전라도 조방장(종3품)을 맡았던 이순신이 정읍현감(종6품)을 맡은데 대해 심한 좌천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정읍현감은 문신들이 맡던 보직으로서, 당시 녹봉조차 없는 허울뿐이고 천대받던 무관이 문관직을 맡은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 기사로서, 동 기사에는 서애선생에 의해 이순신의 이름이 알려진 것으로 되어 있다. 서애선생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기 이전부터 후원자였음을 증명하는 기사이다.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22년 12월 1일 갑술 21번째기사 1589년
이순신을 정읍 현감으로 삼다
이순신(李舜臣)을 정읍 현감(井邑縣監)으로 삼았다. 순신이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었는데 이광이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주달하여 본도의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았다. 류성룡이 순신과 이웃에 살면서 그의 행검을 살펴 알고 빈우(賓友)로 대우하니,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 과거에 오른 지 14년 만에 비로소 현감에 제수되었는데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성적(聲績)이 있었다
넷째, 택당 이식이 지은 이충무공 시장(諡狀)에 서애선생이 이순신을 ‘불차탁용’ 대상으로 천거했음이 나타나 있다. 이식은 이순신과 율곡의 덕수이씨 종친이며 척신 심의겸의 손서이다. 또 인조 때인 1643년-1646년간 선조수정실록 전반부(30년간)를 편찬한 사람이다. 따라서 이식은 없는 이야기를 꾸며 서애선생이 이순신을 천거했다고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인물이다. 또 시장은 왕에게 시호를 청할 때 올리는 글이고, 특히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시기였기 때문에 서애선생에 대한 보다 엄격한 잣대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충무공 시장에 서애선생이 천거한 사실이 들어가 있다.
택당선생 별집 제10권, 행장(行狀) 하
통제사(統制使) 증 좌의정 이공(李公)의 시장
비국(비변사)이 순서를 무시하고 올려서 등용할 대상자를 선발하였는데, 공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는 대개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이 공과 동향(同鄕)이라서 평소부터 공의 훌륭함을 알고는 조정에 적극 추천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섯째, 잠곡 김육이 지은 「이충무공 신도비명」에 이율곡이 서애선생을 통해 19촌 아저씨 되는 이순신을 만나려 했던 일화에 이어, 1590년 서애선생이 이순신을 고산(사)리첨사로(「이충무공 행록」에는 평안도에 있는 '고사리첨사'로 표기되어있다) 힘써 천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김육은 서인으로서 서애선생을 의도적으로 편들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잠곡유고 제13권, 신도비명(神道碑銘)
통제사(統制使) 이 충무공(李忠武公)의 신도비명
---상공(相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공과 더불어 젊어서부터 좋아하던 사이라 매번 대장감이라고 칭찬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이조 판서로 있을 적에 서애를 통하여 공을 만나 보기를 청했으나, 공은 만나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같은 문중 사람이니 만나 보아도 괜찮겠지만, 인사권을 가진 자리에 있으니, 만나 보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
기축년(1589, 선조 22)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정읍 현감(井邑縣監)에 제수되었다. 경인년(1590)에 서애가 힘써 조정에 천거하여 고산리 첨사(高山里僉使)로 승진되었고, 얼마 있다가 자급이 올라 만포 첨사(滿浦僉使)가 되었는데, 대관(臺官)들이 너무 빨리 승진되었다고 하여 개정되었다. 신묘년(1591)에 진도 군수(珍島郡守)와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에 발탁되었다.
여섯째, 선조의 외손자인 신경(申炅,1669-?)이 지은 「재조번방지」(임진왜란사를 주로 다루면서 명나라가 번방인 조선을 구해주었다는 사대주의적 시각에서 기술한 책이다.)에 서애선생이 이순신을 가리포첨사로 추천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저자 신경은 서인‧노론계 학맥의 인물이다.
「재조번방지 1」
기축년(1589, 선조 22)에 정읍 현감(井邑縣監)이 되고, 그해 봄에 진도 군수(珍島郡守)가 되었다가 이윽고 승진하여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가 되니, 이때 와서야 좌의정 류성룡이 추천한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하늘이 우리 나라에 이재를 낳게 하여 / 天爲吾東出異才
젊어서 오랑캐를 깨뜨리고 돌아왔네 / 早年征戰破虜回
임금에 대한 충성은 천성으로 말미암고 / 君侯忠憤由天性
풍운을 품고 지혜의 강령이 크도다 / 腹裏風雲智綱恢
일곱째, 미수 허목이 지은 ‘서애유사’에 서애선생이 이순신과 권율을 장수의 재목으로 추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허목은 남인이다.
허목의 기언 38권 東序기언,‘서애유사’
상이 비국(備局)의 신하들에게 각자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공은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하급 관료에 있었으므로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순신은 일찍이 북변(北邊)의 만호(萬戶)가 되어 반호(叛胡)를 토벌한 공이 많았으나 끌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10년 동안이나 조용(調用)되지 못하다가 이때 바로 정읍 현감(井邑縣監)에서 호남 수군좌절도사(湖南水軍左節度使)로 발탁되어 제수되었다.
여덟째, 이항복의 후손이자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순조14-고종25· 남인을 정략적 차원에서 중용한 대원군이 배척했던 인물이다.)이 편저한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서애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수광의 말을 빌어 "이순신이 서애의 천거에 따라 전라좌수사가 되어 중흥의 공을 세운 명장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임하필기 제19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다
이수광(李睟光)이 이르기를, “이순신이 무신(武臣)으로 있으면서 이름이 별로 드러나지 않았는데, 신묘년(1591, 선조24)에 류서애(柳西厓)가 재상이 되어 그를 쓸 만한 인재로 천거하였다. 그래서 정읍 현감(井邑縣監)으로서 자급을 뛰어넘어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에 제수되어 마침내 중흥(中興)에 첫째로 공을 세운 명장(名將)이 되었다. 아, 지금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이와 같은 사람을 알아보고 천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뿐이다.” 하였다.
위에서 열거한 기록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서애선생이 이순신을 천거한 것이 당색을 떠나 여러 인물들로부터 나타나 있다, 이외에도 「징비록」이나 「난중일기」 등 여러 기록에서 서애선생이 이순신 후원자임이 ‘차고 넘칠 만큼’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또한 송우혜씨는 「징비록」의 사실과 다른 기술 때문에 이순신에 대한 평가가 일정부분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징비록」으로 인해 이순신에 대한 평가가 더욱 높아진 것이 정확한 진실이다. 어떤 이순신 연구가가 “이순신은 권력을 지닌 문신인 류성룡에게 아부하고 빌붙어서 출세한 무장”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연구가 개인의 주관적인 평가일 뿐이며, 징비록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데, 마치 「징비록」이 원인을 제공한 것처럼 예거하였다.
왕조시대의 국정은 최종적으로 왕의 명령이나 지시 형태로 하달되는 것이므로, 명령이나 지시 이전에 물밑에서 이루어지는 신하들이 건의 등은 생략되기 일쑤이다. 1597년 1-3월 이순신을 반드시 죽이려고 논죄하는 선조의 태도("이순신(李舜臣)이 조정을 기망(欺罔)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무함하기까지 하며---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율(律)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선조실록, 선조30년 3월 13일 기사〉)를 보면 선조가 이순신의 능력을 소중하게 여긴 불차탁용의 주역이 아님은 분명하다. 선조에게는 이순신에게 애정이나 연민이 없는 반면, 서애선생은 당시 어전회의에서 궁지에 몰려 있으면서도 "내가 이순신을 수사로 천거했다"고 자진해서 언급하였다. 무슨 증명이 더 필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