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클린 케네디(1929~1994)는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와 더불어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부인으로 꼽힌다.
재클린 케네디의 삶을 스크린으로 옮긴다면 남편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과 비극적 죽음, 그리스 선박 부호 오나시스와의 떠들썩한 사랑과 재혼을 떠올릴 것 같다. 하지만 25일 개봉한 영화 '재키(Jackie·감독 파블로 라라인)'는 지금껏 우리가 간직하고 있던 재클린 케네디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영화는 남편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 댈러스에서 리 오즈월드의 총격에 암살당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낭만적 사랑이나 화려한 백악관 생활은 거두절미(去頭截尾)한 채 곧바로 이면의 차갑고 건조한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내털리 포트먼이 연기한 재클린 케네디는 불안과 초조함에 사로잡혀 연신 담배에 불을 붙인 채 넋두리를 늘어놓는 여인으로 묘사된다. 남편의 장례식 직전, 재클린 케네디는 이렇게 되뇐다. "언젠가부터는 저도 가늠이 안 됐죠.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연기였는지…." 이 영화의 장르는 시대극이나 로맨스가 아니라 심리극에 가깝다.
극 전개상 필수적인 암살 장면 등을 제외하면 남편 케네디 대통령(캐스파 필립슨)은 존재조차 희미하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재클린 케네디가 주인공이라고는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마저 부각되는 일이 드물다는 건 무척 역설적이다. 인터뷰하는 기자와 백악관 스태프들도 철저하게 조연에 머문다. 사실상 영화는 재클린 케네디가 홀로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고독한 1인극이다.
시종 정적(靜的)인 분위기를 유지하는 이 드라마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은 역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피사체에 바짝 다가간 근접 촬영이나 화면이 거칠게 흔들리도록 카메라를 들고 찍는 기법(handheld camera)은 재클린 케네디의 불안정한 심리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단아한 드레스와 봉긋하게 부풀어오른 단발머리는 물론, 숨소리가 살짝 섞여 들어가서 속삭이는 듯한 말투까지 포착한 포트먼은 '블랙 스완'(2010년) 이후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남편의 피로 범벅이 된 분홍색 드레스를 벗다가 오열하는 장면은 포트먼의 연기 덕분에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