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서울대 출신 엔지니어가 의기투합해 만든 ‘노을’은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가치 있는 기술 개발’을 목표로 만들어진 회사다. 그 첫 성과물이 말라리아 진단 키트다. 작은 박스 크기의 키트 하나면 혈액 한 방울로 언제, 어디서든 쉽고 빠르게 말라리아 감염 여부를 검사할 수 있다.
모기가 매개체가 되는 말라리아는 제3세계 빈민을 괴롭히는 흔한 감염병 중 하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2015년 세계 말라리아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매년 60만~70만 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한다. 이 중 90%가 아프리카 지역 주민이고, 그중 70%가 5세 이하의 어린이다. 조기 진단과 치료가 매우 중요하지만 의료시설의 부족과 경제적 이유 등으로 병원을 찾지 못해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1년 반 동안 생활하며 말라리아의 심각성을 알게 된 이동영 대표는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기술을 개발해보고 싶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의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말라위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와 당시 서울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동네 친구이자 서울대 동기였던 임찬양 대표는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그가 올린 글을 보고 만남을 청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 대표의 미국 유학과 말라위 생활 등으로 한동안 만나지 못한 탓에 근 10년 만의 재회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벤처 캐피털리스트로 일하고 있었다. 좋은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벤처에 투자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었던 그는 “내가 담당하는 분야가 헬스케어·바이오 관련 업종이라 처음에는 친구로서 창업·투자와 관련해 조언을 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얘기를 듣다 보니 이건 투자를 할 게 아니라 직접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평소 ‘돈이 되는 거면 투자를 하고, 인생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면 창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친구가 아프리카로 갔다는 것 자체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게다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원천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성이 충분해 보였죠.”(임찬양)
“아프리카로 갔던 건 현장을 보고 싶어서였어요. 제 연구가, 제 기술이 세상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까, 실제로 쓰인다면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면 좋겠다,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거든요. 대기업에 취업하면 그런 질문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 같아서, 말라위 병원에 연구원으로 자원해 갔어요. 거기서 보니 생각보다 할 일이 너무 많더라고요. ‘진짜 기술이 필요한 곳이 여기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래서 말라리아 퇴치를 생각하게 되었죠.”(이동영)
이들의 창업이 본격화된 것은 2015년 9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CTS 프로그램(Creative Technology Solution Program, 혁신기술 기반 창의적 가치 창출 프로그램) 공모전에 참여한 것이 계기였다. 이들의 아이디어가 최종 선발된 15개 스타트업에 포함되면서 이동영 대표는 당시 일하고 있던 대학 연구소를 나와 임찬양 대표와 함께 ‘노을’을 만들었다.
여기에 임 대표와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동기인 김경환 대표, 같은 과 후배인 신영민 대표가 뜻을 함께하며 네 명의 공동대표 체제가 되었다.
김경환 대표는 LG전자에서 오래 근무한 모바일 시스템 전문가이자 뒤늦게 로스쿨에 입학해 변호사가 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고, 신영민 대표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영상인공지능 전문가다.
이 대표는 “이 작은 키트에 진단실험실 기능을 모두 담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 기술이 필요한데, 고맙게도 각 분야 전문가인 이 친구들이 흔쾌히 합류해주어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데 단 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노을이 보유하고 있는 ‘핵심 기술’은 ‘LOC(Lab On a Chip)’로 요약된다. 즉 실험실(Lab)을 간단한 칩(Chip)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실험실에서 감염 여부를 검사하는 기존의 방법은 절차도 복잡하고, 그만큼 인력이 필요하다. 대신 칩 속에 다양한 데이터를 저장해 한두 방울의 혈액으로 10여 분 만에 감염 여부를 진단해내는 것. 질병에 따라 각각 다른 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진단 범위를 얼마든지 넓힐 수 있다. 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 대표는 “이론적으로는 현재 20개 질환까지 가능하다”며, “하지만 지금은 말라리아, 결핵, 빈혈 등 제3세계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질병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을은 회사는 작지만 이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전문가들이 모두 모여 있어요. 4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15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존의 솔루션으로는 제3세계 의료·보건 문제를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혁신을 통한 새로운 기술만이 이 문제를 풀 수 있지요. 혁신은 융합에서 나오는 것이잖아요. 바이오, 재료·화학, 모바일, 인공지능, 기구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융합해 탄생시킨 결과물이 바로 이 말라리아 키트입니다. 무엇보다 ‘사회에 기여하는 기술을 만들자’는 같은 사명을 가지고, 즐겁게 일하는 회사라는 게 가장 큰 자랑이죠. 이 다양한 조합이 앞으로 어떤 혁신을 만들어낼지 무척 궁금합니다.”
이미 노을은 이 진단 키트의 개발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6월에는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과학기술혁신 포럼’에서 ‘주목할 만한 15개의 이노베이터’로 선정됐고, 말라리아 퇴치에 앞장서고 있는 빌게이츠재단에서 지원하는 백신 개발 업체와도 협업을 논의 중이다. 생명과학 연구로 유명한 스위스 바젤대학 관계자는 한국 방문 기간 중 일부러 시간을 내 노을을 찾아 큰 관심을 보이며 공동 연구를 제안했다. 현재 이 진단 키트는 캄보디아 정부로부터 임상실험을 위한 연구윤리심사 승인을 받아 실제 현장에서 임상실험을 진행 중이다.
이 대표는 “바이오·헬스케어 산업이 부가가치가 매우 높지만 선진국 중심으로 개발돼 빈곤국은 혜택을 보기 어렵다”며 “그 벽을 깨는 게 우리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것, 그래서 개발자인 저희들의 삶도 즐거워지는 그런 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엔지니어로서 또 노을을 통해서 저희들이 이루고 싶은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