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권은 일제 강점기 부동산 개발업자로 북촌과 익선동 한옥마을,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 경성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했다. 당시 흔히 '집 장수'라고 매도되기도 했지만, 경성의 '건축왕'이라 불릴 정도로 경성 부동산 개발을 주도했다. 그는 자수성가한 자본가로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 운동의 재정을 담당하며 일제에 맞선 민족운동가였다.
정세권,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정세권은 1888년 4월 10일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잇는 가난한 가정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매우 천재적인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서당에서 교육을 받았고 어린 나이에 장원을 하였으며, 진주사범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진주사범학교 3년 과정을 단 1년 안에 졸업한 것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정세권에 대한 기록 자체가 드물기에 가족들의 설명과 기록이 다소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18세에 면장이 되었다.
1919년, 경술국치를 맞고 정세권은 경성으로 올라와 건축업에 뛰어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명동 일본인 빵집에서 배달한 빵과 우유로 식사하고 현장으로 나가 작업을 감독했다. 막내딸 남식(89)은 "고향 초가집을 다 기와집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나라가 망하면서 면장직을 사임했다. 더럽고 가난한 경성을 보고 아버지께서 저걸 다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1920년 회사령*이 철폐된 뒤,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 개발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한 정세권은 토지 매수부터 기획, 설계, 시공까지 주택 건설 과정을 모두 직접 총괄했다. 그는 가회동 일대를 비롯한 북촌의 한옥 대저택을 사들여, 여러 채로 분할해 도시형 한옥을 지어 분양했다. 당시 명동과 퇴계로 등 남촌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경성 거주 인구가 급증하면서 북촌을 넘보고 있었다. 정세권은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을 막아야 한다"며 북촌 재개발에 나섰다. 정세권이 조성한 도시형 한옥은 북촌과 인근뿐 아니라 창신동·서대문·왕십리 등 교외까지 이르렀다. 정세권은 일제의 탄압으로 사업을 사실상 중단한 1940년까지 한 해 300채 정도의 한옥을 지었다.
세간에서는 북촌을 '전형적인 조선 양반 마을'로 알고 있지만, 21세기 눈앞에 보이는 북촌은 조선 시대와 관계가 없는 1930년대 개량 한옥 마을이다. 그 한옥 마을 전부를 정세권이 만들었다.
정세권은 다른 주택업자와 달랐다. 정세권이 지은 집은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고 작지만 마당이 있는 '살 만한 집'이었다. 그리고 한옥이었다. 딸 남식은 "(아버지는) 조선 집이어야 조선 사람이 살기 편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당신도 늘 한복을 입고 새벽에는 시조를 읊곤 하셨다." 고 말했다.
경복궁과 창덕궁·종묘 사이에 있는 동네를 북촌이라고 한다. 삼청동과 가회동, 재동과 계동이 북촌에 포함돼 있다. 한옥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북촌은 큰 길가는 물론 골목길에도 크고 작은 공방과 기념품 가게가 숨어 있어 관광객들 눈과 발을 바쁘게 만든다. 나무 대문마다 '주민이 살고 있으니 조용히'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주민들은 골치지만 한국인에게는 추억을 주고 외국인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그 무엇'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다. 특히 1930년대 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가회동 31번지 일대는 1930년대 근대 한옥이 집단으로 보존돼 있어 관광객으로 늘 붐빈다.
신간회·조선어학회를 지원
정세권은 도시 개발로 얻은 부(富)를 민족운동에 사용했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를 맡아 재정의 상당 부분을 부담했고 기관지를 발간했다. 1929~1930년 물산장려회 총예산은 1,866원 53전이었고, 이 가운데 그가 지출한 사비(私費)는 65.4%인 1,220원이었다. 당시 한옥 한 채가 500원이었다. 1931년에는 낙원동에 물산장려회 회관을 짓고 사비로 장려회를 이끌었다.
또, 만주동포구제회를 만들어 김좌진 장군 유족을 비롯해 만주에서 순국한 조선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민족 지사들이 양사원이라는 인재 양성 학교를 만들자 여기에도 참가해 큰돈을 출연했다. 1939년에는 고향 덕명리에 덕명간이학교를 세웠다.(초등학교로 바뀐 학교는 1993년 폐교됐다.)
조선어학회에는 회관을 지어 기증하고 운영비를 지원했으며, 신간회 경성지회에서도 활동했다. 정세권은 국내 민족운동의 중심인물이던 안재홍, 조선어학회를 이끌던 국어학자 이극로(1893~1978)와 유대가 깊었고, 이를 토대로 산(産)·학(學)·언(言)의 연대 활동을 도모했다.
1930년대 중반, 일제는 내선일체을 내세우며 우리말과 한글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38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어 과목을 폐지했고, 학교 안에서의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였다. 따라서 1935년 자체 회관을 갖추고 왕성한 활동을 하던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눈엣가시였다. (화동(花洞)에 있던 조선어학회 회관은 땅도 건물도 그가 기증한 재산이었다.) 특히, 각종 활동을 지원한 정세권은 일제 입장에서는 조선어학회 돈줄로 파악되어, 선순위 감시 대상이었다.
그러다 1942년 10월,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옭아내기 위해 의도한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난다. 그해 8월 '국어를 사용하다가 벌을 받았다'고 적힌 함경남도 항흥영생고보 여학생 박영옥 일기장이 조선인 형사 안정묵, 일본명 야스다(安田)에게 발각됐다. 10월 1일 조선어학회 회관에서 한글학자 33명과 증인 48명이 경찰서로 끌려갔다. 사람들은 몽둥이로 맞는 육전(陸戰), 물을 코와 입에 퍼붓는 해전(海戰), 공중에 매달아 때리는 공전(空戰) 고문 등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때 정세권 또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이후 그는 상당한 재산을 일제에 빼앗겼다.
1943년 다시 경제범으로 몰린 정세권은 동대문 경찰서에 끌려가 재산을 강압적으로 탈취당했다. 이후, 총독부는 건양사 건축 면허를 취소해버렸다. 정세권은 광복 때까지 집을 짓지 못했다. 땅과 기업을 빼앗긴 정세권은 몰락했다. 가난한 조선인을 위해 근대 한옥을 짓고, 번 돈으로 민족운동을 지원한 대가였다.
["日 진출 막아야" 한옥 단지 조성… 조선어학회·물산장려회 등 지원]
[한글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는 어떤 단체였나?]
정세권과 같은 건축가에 대한 평가는 그동안 매우 박했다. '집 장수'라 매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북촌 지역에서 그가 근대식 한옥 집단 지구를 건설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북촌에서 바라보는 주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일제는 조선인들을 위한 주택 개발은 커녕, 본인들을 위한 주택을 대량으로 지었을 수 있다.
정세권과 같은 인물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들의 개발 사업이 경제적 이윤 추구에서 시작되었건 아니건, 당시 '북촌 지역을 일본인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한옥 집단 지구라는 형태로 투영돼 개발되었다. 결과적으로 많은 수의 조선인이 북촌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고, 이렇게 살아남은 북촌은 삼청동, 계동, 익선동 등의 근대 한옥 집단 지구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2013년에 익선동 한옥 지역을 조사하던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경민 교수는 찾는 자료마다 정세권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와 아예 연구 방향을 정세권으로 틀었다고 한다. 김경민 교수는 "국회도서관까지 뒤져 자료를 모아보니 정세권은 단순한 집 장수가 아니라 잊힌 애국 기업가였다"고 했다.
정세권을 이야기한 사람들
정세권, 전 생(生)을 바친 애국(愛國)
정세권, 후대의 이야기
덕성여대 명예교수인 손녀 정희선이 말했다. "존경하는 집안 어르신이요 세상에 자랑스러운 큰 어른이다." 정세권은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 잠들어 있다.
- 위치: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