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사실이 맥 못 추는 시대다. 거짓 정보와 페이크 뉴스(fake news)가 여론을 이끌고 선거와 정치에 영향을 끼친다. 촛불과 탄핵에 반대하는 ‘맞불 진영’은 특히 이를 확신한다. 언론과 야당이 대한민국을 흔들고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무고한 박근혜 대통령을 ‘기획으로 엮어’ 탄핵까지 왔다고 여긴다. 하지만 맞불의 논리를 일방적으로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만으론 포스트 트루스가 범람하는 오늘의 사회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포스트 트루스(post-truth·탈진실)는 작년 말 영국 옥스퍼드 사전이 뽑은 '올해의 단어'다.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개인적 신념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뜻한다. 영국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미국 대통령 선거를 치른 2016년에 포스트 트루스 사용 빈도가 전년도보다 20배 폭증했다. '기득권에서 나온 팩트를 향한 불신이 늘어났다'는 옥스퍼드 사전의 설명이 의미심장하다. 언론이 신성시하는 팩트를 의심하고 언론을 기득권 집단으로 보는 대중이 증가하는 건 전 세계적 현상이다. 선정주의에 빠진 언론의 깊은 자기 성찰이 요구된다.

트럼프는 포스트 트루스의 달인이다. 단편적 사실과 주관적 해석을 짜깁기해 대중을 선동한다. 객관적으론 사실이 아니지만 '스스로 진실이라고 느끼는 일'을 부풀려 미국 대중의 마음을 얻은 트럼프의 성공이야말로 현대가 탈진실의 시대임을 입증한다. 언론과 제도 정당, 지식인층의 십자포화조차 무력화시킬 정도로 거센 위력이었다. 포스트 트루스에 대한 이해 없이 오늘의 세계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탈진실 자체가 언론 자유의 산물이라는 점이 역설적이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진실을 낳는다'는 통념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사태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일반화가 개인 모두를 뉴스 생산자로 만들었다. IT 강국 한국의 현실, 즉 누구나 어디서든 뉴스에 접근 가능한 정보 주권의 확장이 오히려 탈진실을 잉태했다. 이는 정보 유통량을 늘려 시민 정치를 활성화하는 순기능과 동시에 특정 대상에 대한 적대감을 키워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역기능도 있다. 우리 주위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정치 선진국에서조차 포스트 트루스가 대세(大勢)다. 작년 9월 독일 총선에서 이민자가 소녀를 성폭행했다는 거짓 뉴스로 메르켈 총리가 큰 타격을 입었다. 유럽 통합과 이민자 수용에 앞장선 프랑스 대선 유력 후보 마크롱이 월가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 요원이라는 러시아발(發) 보도도 급속히 확산 중이다. 러시아는 미국 대선에서도 힐러리에 대한 거짓 뉴스를 퍼트려 선거에 영향을 끼쳤다. 사실 조작에 능한 러시아는 탈진실의 대국이다. 인공지능 '봇(bot)' 수천 개를 소셜 미디어에 투입해 반대자를 무차별 공격하는 허위 콘텐츠를 양산한다. 영·미·불·독 4개국이 러시아를 비판하지만 자국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포스트 트루스가 들불처럼 확산됐을 리 만무하다.

우리는 촛불과 맞불을 부른 뉴스의 홍수 안에 탈진실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경계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깨어 있는 시민의 균형 잡힌 자세다. 진실의 힘이 줄어드는 데 반비례해 이미지와 상징 조작이 확대되는 것이 현대 정치의 막강한 흐름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든 원하는 결론에 이르는 걸 쉽게 만드는' 위력을 가진 탈진실과 정면 대결하는 시민적 용기 없이는 민주공화국의 밝은 미래도 없다. 포스트 트루스가 진실을 압도하는 세상은 빅 브러더가 지배하는 새로운 암흑시대다.

닉슨 전 미국 대통령 탄핵의 가장 큰 이유는 워터게이트 도청 자체라기보다는 닉슨이 국민과 의회 앞에 끊임없이 거짓말을 했다는 데 있다. 박 대통령이 언론 보도와 검찰 및 특검 수사의 사실 증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포스트 트루스 전략으로 일관하는 건 한국 민주주의를 크게 해친다. 괴담을 동원해 헌재의 탄핵 선고 시점과 결정 내용을 압박하는 야권도 탈진실 전략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헌재의 탄핵 인용 여부나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느냐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탈진실과 싸울 것이냐의 문제다. 뉴스를 걸러내는 언론의 ‘게이트 키핑’ 능력을 높여야겠지만 감정과 신념보다 객관적 사실을 앞세우는 시민적 훈련이 궁극적 해법이다.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모여 집단적 신념만 부풀리는 확증 편향의 관행은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우리가 탈진실을 자발적으로 껴안을 때 역사는 어둠 속으로 후퇴하고 만다. 사실이야말로 탈진실의 악마적 유혹을 깨는 최강(最强)의 힘이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최대 공적(公敵)은 독재가 아니라 포스트 트루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