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문패를 잘못 붙였다. 전시 제목이 '암시적 기호학'이라니!

딴지를 걸자 화가 오세열(72)이 콧수염을 씰룩이며 손을 내저었다. "어이쿠, 평론하는 분들이 그리 붙인 거지, 내 그림 하나도 안 어려워요. 볼수록 얼마나 재미있게요."

오세열은 요즘 국내외 컬렉터들이 가장 주목하는 화가다. 지난해 10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KIAF'(한국국제아트페어)에서 개막과 동시에 그림이 팔려나간 최고 인기 작가였다. 2016년 한 해만 파리, 런던, 상하이, 브뤼셀 등 해외 주요 도시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단색화인 듯, 단색화 아닌 것이 뒤늦게 명성을 얻은 오세열 회화의 매력이다.

옛날 함지박을 액자 삼아 희미하게 그린 오세열의 인물화. 그는“전쟁 세대의 불안과 실존의식을 팔다리 없는 인물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서라벌예대 회화과)이던 1960년대부터 최근작까지 60여점이 총출동한 이번 전시는 다가올 봄처럼 경쾌하고 화사하다. 선생님 몰래 칠판에 낙서한 개구쟁이들 그림, 땅따먹기 하다 집으로 돌아간 코흘리개들이 남긴 흔적 같기도 하다. 함지박을 액자 삼아 그린 인물화를 사람들이 뚫어져라 보자 화가 어깨가 으쓱거렸다. "이 코를 뭘로 만들었게요? 계란판 오려서 붙인 겁니다."

장난기 가득한 화가를 닮아 그림엔 익살이 넘친다. 암호 같은 숫자가 빼곡히 들어찬 '기호학적' 배경에 한 줄로 심긴 '꽃'들은 쓰다 만 크레용, 집게, 일회용 포크, 치간칫솔로 연출한 것이다. 길 가다 주운 찌그러진 음료수 뚜껑, 놋숟가락, 광고 전단, 색색깔 단추들이 고졸한 화면 한가운데 박혀 묘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만날 그리기만 하면 재미없잖아요? 떼기도 하고 오려 붙이기도 하고. 아이들처럼요."

“친구야 놀자, 탕!”순수했던 시절의 동심으로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오세열의 2016년 작품‘무제’. 그가 시각적 배경으로 즐겨 활용하는 숫자와 팔·다리가 없는 사람, 아이가 그린 듯한 새와 달, 꽃 그림이 한 편의 동화처럼 어우러진 작품이다.

아라비아 숫자들 한복판에 핀 패랭이꽃 한송이는 뭉클하다. 평론가 이용우는 "시적(詩的) 감수성을 배태한 백미(白眉)"라고 했다. 숫자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릴 적 몽당연필에 침 묻혀서 1·2·3·4 써나갔던 추억, 수(數)가 만국 공통이라는 점, 그리고 사람이 태어나면 좋든 싫든 평생 숫자와 싸워야 하는 운명이라" 애증이 교차해서란다. 오세열이 그리는 사람 생김도 오묘하다. 한쪽 팔이 없거나, 외눈박이, 또는 다리가 짧은 불완전체다. "돈과 경쟁에 찌들어 사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라고 할까요."

동화처럼 포근하지만, 그림은 억척 노동의 결과다. 오세열은 그리지 않고 긁는다. 광목천 위에 기름 뺀 유화물감을 예닐곱 번 두껍게 바른 뒤 면도날이나 나무칼, 혹은 이쑤시개로 일일이 긁어 숫자를 새기고 형상을 만든다. "캔버스가 내 몸이라는 생각에…. 거기 상처를 입힌다고 할까, 살아온 여정을 새긴다고 할까요. 어느 땐 뼈를 깎고 있다는 착각도 들지요(웃음)."

'포스트 단색화 아니냐'는 질문엔 펄쩍 뛰었다.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아, 재미있다' 소리가 나와야 해요. 유니크해야 하고. 모노톤인 건 맞지만 난 인물도 그리고 단추 같은 물건도 사용하죠. 단색화가 인기라고 공장처럼 찍어내듯 하는 건 예술이 아니에요."

동심(童心)으로 문명에 딴지 거는 오세열 그림에 평론가 오광수는 "유화의 기름기가 걸러져 마치 퇴락한 옛 기물을 대하는 것 같은 푸근함"이 담겼다고 했다. 거기 순수했던 시절의 정담(情談)과 뻥튀기 기계처럼 잊힌 추억들이 스며있다. "간담회를 한다니 간담이 서늘했다"며 좌중을 웃긴 화가는 "내 그림은 나이와 반비례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칠십이 넘었지만 그림은 사십대가 그린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요, 하하!" 22일부터 3월 26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02)720-15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