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학교, 회사, 동호회 등 인간이 모여 이룬 '공동체'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중 멀쩡한 사람만 존재하는 집단을 짚어내는 건 의외로 쉽지 않다. 어느 공동체건 사람이 뭉치다 보면 성품이 악하거나 어딘가 부족한 이가 적어도 한둘은 섞여들기 마련이다. 이런 인물들을 지칭하는 인터넷 은어(隱語)가 바로 '빌런(villain)'이다.
빌런은 영어단어로 '악당'을 뜻한다. 하지만 인터넷 은어로 사용될 때는 의미가 좀 더 넓어진다. 원래 뜻으로도 통용되지만, 때로는 악(惡)과는 무관하되 그저 기괴스러울 뿐인 행동을 일컬을 때도 쓰이기 때문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이와 같은 의미 확장이 발생했는지,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시민과 범죄자 사이 빌런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말이 있다. 달리 말하면, 세상엔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도덕적으로는 지탄받을 만한 일이 있다. 그리고 인터넷에는 그런 짓을 실제로 벌이는 인간들이 널려 있다. 여하간 법을 어긴 건 아니니 이들을 범죄자라 부를 수는 없지만, 평범한 시민이라 하기에도 분명 무리가 있다. 그 애매한 속성의 인물을 지칭하기 위해 채택된 단어가 '빌런'이다.
최초로 빌런을 이 용도로 쓴 커뮤니티는 인터넷 문-하수도 '디시인사이드 고전게임 갤러리(고갤)'로 알려져 있다. 처음 등장한 시기는 지난해 중반 즈음이며, 창시자는 불명이다. 이웃 갤러리인 '디시인사이드 히어로 갤러리(히갤)'에서 창작물에 등장하는 악당을 가리킬 때 즐겨 쓰는 단어를 끌어온 것이 유래인 듯하다. 원산지가 아닌 고갤에서 의미가 변한 이유는, 당시 해괴한 악행을 일삼고 이를 글로 써서 올리는 이들이 다른 커뮤니티에 비해 고갤에 많았던 탓으로 추정된다. 빌런의 발상지 고갤은 한때 최소 1일 1빌런이 출연할 정도로 마귀소굴이었다.
◇무식한게 죄인 빌런
어리석은 사람은 종종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곤 한다. 전혀 악의가 없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의도야 어찌 됐건, 당한 입장에서는 매한가지로 민폐일 뿐이다. 덩크나 레이업이나 집어넣기만 하면 같은 2점인 것과 마찬가지다.
일전에 언급했던 바와 같이, 무식은 성기와 같아서 소지 자체가 허물은 아니지만, 사람들 앞에서 꺼내 휘두르는 순간 죄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네티즌은 무식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도 빌런 칭호를 부여했다.
특히 이 계열에서 가장 흉악한 빌런 중 하나가 '꼰대 빌런'이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식함이 종종 꼰대의식과 결합해 끔찍한 혼종을 낳는다. 예를 들면, 윗사람은 아재개그를 해 성공적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자평하는데, 아랫사람들은 웃기지도 않는 흰소리에 장단 맞춰 주느라 녹초가 된 상황을 떠올려 보자. 아랫사람을 괴롭게 만들어 놓고도, 정작 본인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되려 시혜를 베풀었다 생각한다. 자기가 모자란 탓에 사고 쳤다는 사실이라도 눈치채는 평범한 무식빌런보다 더 심각한 케이스다.
◇'악(惡)'의 의미는 점차 흐려지고
사실 인터넷에서 언급되는 빌런은 대개 무식빌런 계열이다. 즉, 남이나 내가 저지른, 죄 될 정도는 아닌 어이없고 한심한 짓을 인터넷 글로 써 빌런 칭호를 따는 게 보통이다. 애초에 진짜 악당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사고를 쳤으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이유가 없다.
그 탓에 인터넷에서 빌런은 사용이 거듭될수록 '악'의 의미가 점차 엷어졌고, 대신 '어이없고 한심한 짓' 쪽에 무게가 실리게 됐다. 그러다 보니 어느 시점부터는 남에게 이렇다 할 큰 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황당한 행동을 하면 빌런 소리를 듣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물론 어원이 어원이니만큼, 소소하게나마 남에게 손해를 끼친 케이스가 대부분이긴 하다. 디저트빌런의 어머니께서는 저 냄비를 다시는 쓸 수 없으셨을 것이다. 바로 뒤에 예시로 나오는 메디컬빌런은 잘못된 정보를 퍼트려 누군가에게 혼란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말도 안되는 헛소리지만, 저런 말을 남들 앞에서 태연히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정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도 빌런 소리를 듣기도 한다. 온갖 빌런들이 벌이는 짓이 너무 웃기다 보니, 결국엔 ‘악’ 개념이 완전히 휘발된 상황에서도 빌런 명칭을 쓰는 상황까지 이른 것이다. 언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언어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간주할 수도 있겠다.
◇세상을 지키는 악당, 피카레스크형 빌런
약간 특이한 경우로, 정말 드물지만, 영웅을 퇴치하며 네티즌의 호감을 사는 유형의 빌런도 있다. 너굴맨이 등장하는 곳에 종종 나타나는 침팬빌런이 대표적 예다. 일종의 반(反)영웅으로, 문학계에서는 이런 인물이 주인공인 작품을 '피카레스크'라 부른다. 즉, 침팬빌런은 피카레스크형 빌런이라 칭할 수 있겠다.
여담으로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어느 한 쪽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빌런도 있다. 당하는 이 입장에서는 악인데, 사회 전체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선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노예해방빌런이 좋은 예다.
◇대부분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빌런(villain)의 어원은 중세 농노를 뜻하는 고대 영어 'villein'이다. 귀족과 도시민들이 흙에 절어 있는 데다 거름 냄새를 풍기는 농민을 흉악하다 여긴 데에서 유래했다 한다. 하지만 겉보기에만 음울하고 사악해 보였을 뿐, 당대 빌런이라 불렸던 농민들은 대개 순박한 일꾼들이었다.
인터넷 세상에서의 빌런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중세 시절 일부 농민이 기아와 가난에 시달리다 도적질에 손을 댄 탓에 빌런 이미지가 굳어졌던 것처럼, 인터넷에서 빌런이라 불리는 인물 역시 일부는 실제로 비도덕적인 행동을 해 손가락질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조금 괴짜거나 엉뚱한 행동을 벌일 뿐, 근본은 우리와 별다를 바 없는 평범한 시민이다. 그러니 인터넷상에서 누군가가 빌런으로 불리더라도, 어지간히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라면, 따뜻한 시선을 건네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 주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