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제 산업의 메카, 창신동… 동대문 의류 시장 떠받치는 패션의 뿌리
재봉틀과 오토바이 소리 유난하던 봉제거리, 70년대 섬유 수출 이끌었지만
'봉순이 언니' 사라지고, 노동자 평균 연령은 59세... 그마저 중국, 베트남 저가 공장에 밀려
박원순 시장 주도로 창신동 봉제 박물관 건립, K패션 거리로 재생 꿈꿔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지하작업실 환풍기를 타고 골목으로 넘어온다. 전봇대 옆 하수구마다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자투리 천을 담은 대형 비닐봉투가 담벼락 밑에 널브러져 있다. 좁은 다세대주택 골목 사이로 원단을 실은 오토바이들이 오르내린다. 담벼락 곳곳엔 ‘하청 구합니다. 여성복 상의, 바지(고무줄)’ 라고 적힌 A4 용지가 붙어 있다.
겉보기엔 흔한 달동네 주택가지만 대다수의 건물 지하층과 1층에는 간판 없는 봉제공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 패션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서울 동대문의 배후, 창신동 봉제골목이다. 드라마 ‘미생’에서 장그래가 어머니와 살던 집,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납득이가 키스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골목길,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길라임이 살았던 낡은 연립주택이 모두 이곳에서 촬영됐다.
비교적 날이 따뜻했던 지난 28일 오전 창신동을 방문했다. 동묘역 10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20분 정도 산을 올라 종점에서 하차했다. 낙산공원 입구에서 마을 해설사 문무현(76)씨를 만났다.
“이 곳은 조선시대만 해도 호랑이가 나오는 깊은 산 속이었어요.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단종과 이별하고 64년간 홀로 지낸 곳이기도 합니다. 이후 사람이 별로 없어 채석장으로나 쓰였던 곳인데, 1950~1960년대에 먹고살기 위해 상경한 이주민과 피란만이 몰려들어 판자촌으로 변신했습니다. 특히 가까운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종업원들이 이곳에 주로 숙소를 잡았죠.”
◆ 재봉틀과 오토바이 소리로 채워진 봉제거리…1970년대 한국의 섬유 수출 이끌어
1970년 재단사 전태일이 분신으로 열악한 봉제공장 노동 실태를 고발하자 평화시장은 기존의 극단적인 저임금·장시간 노동 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대기업들이 기성복 시장에 속속 뛰어들어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이 때문에 1970년대 말 평화시장 일대 봉제공장은 땅값과 임대료가 싼 인근 창신동으로 줄줄이 옮기게 됐다. 창신동이 봉제산업의 메카가 된 연유다.
15살 봉제일을 시작해 어느덧 환갑을 넘긴 홍명희(63) 레이나패션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 봉제를 배울 당시엔 환경이 아주 열악했어요. 일요일은 커녕 명절에도 쉬는 날이 전혀 없었죠. 잠 안오는 약을 먹이고 사장들이 일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밤새도록 재봉틀을 돌리다가 잠깐 졸아 다치는 일이 허다했지요.”
홍씨처럼 1970년대 수많은 ‘시다’ 종업원들, 즉 ‘봉순이 언니’들은 하루 15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을 통해 고향의 가족을 부양하고 오빠와 동생을 대학에 보냈으며, 섬유를 한국의 대표적인 수출산업으로 일궜다. 주로 10대 후반, 20대 초였던 그들이 이제는 머리가 희끗한 50, 60대가 돼 창신동 봉제공장의 주인이 됐다.
그러나 공장 노동자들은 기자의 방문을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초크를 한 손에 쥐고 패턴을 그리던 한 미싱사는 사진을 찍겠다는 기자의 요청에 난색을 표했다. 그는 “요새 이런일 하는게 무슨 자랑이라고 얼굴 팔리고 싶겠어요? 남들 보기에 썩 좋은 건 아니잖아요”라며 언성을 높였다.
공장 주인도 “예전에 방송국에서 카메라 들고 와 촬영도 하고 그랬는데, 우리가 무슨 신기한 일을 한다고 찍어가는지 모르겠네요. 요새 봉제업에 대한 인식이 별로라 이런 취재는 그다지 달갑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 의류 생산 기지 이전, SPA 브랜드의 약진, 젊은 인력 부족으로 삼중고 겪는 봉제산업
숨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날만 계속될 것 같던 창신동 봉제거리는 의류 생산 관련 업체의 대부분이 중국과 동남아로 이전하며 침체기를 맞고 있다. 최근에는 SPA브랜드의 옷이 인기를 얻으며 동대문시장표 의류의 수요가 줄어든 것도 재봉틀이 예전처럼 돌아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김신훈(61) 대성어패럴 사장은 “제가 이거 한지 벌써 40년이 넘었어요. 어느덧 환갑이네요. 여성복을 주로 만들다가 유니폼 제작으로 돈을 꽤 벌었는데, 당시 큰 은행들 유니폼 다 내가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후 중국한테 밀리고, 이젠 중국도 베트남, 캄보디아에 밀렸다네? 가격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단가를 못 올려요. 지금도 90년대 단가 그대로야. 이러니 품질에 신경쓸 여력이 있을 턱이 있나”라고 말했다.
봉제업계 종사자들은 신규인력이 유입되지 않는 점을 가장 큰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김 사장 역시 공장을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자녀에게 물려주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 애는 자기 일 하기 바쁘다”며 말끝을 흐렸다. 봉제공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젊은 사람은 찾기는 어려웠다. 간혹 젊은 사람이 보이면 외국인 노동자거나 작업장을 운영하는 가족이 잠시 들른 경우였다.
차경남 서울봉제산업 회장(57)은 젊은 노동자가 봉제업을 기피하는 현실은 앞으로 한국의 패션산업이 성장하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과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봉제업을 시작한 노동자들은 대부분 50~60대가 됐습니다. 봉제는 ‘바늘에 구멍 넣을수 있을 때’까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 적어도 5년간은 지금 수준의 인력이 유지될 수 있겠죠. 하지만 이후, 매년 봉제사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 겁니다. 젊은층이 패션산업에서 화려한 디자이너는 꿈꾸지만, 재단사는 되려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봉제는 패션산업의 뿌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재단사 없이는 좋은 디자인도 나올 수 없습니다.”
◆ 문화·예술의 거리로 거듭나기 위해 단장하는 창신동 봉제거리
동대문역 1번 출구 근처 봉제거리 초입구에서 왼쪽 골목인 647번지로 들어오면 바닥에 ‘봉제거리 박물관’이라고 적혀있다. 이 골목길 자체가 박물관이란 의미다. 5분 남짓 올라 골목끝에 도착하면 우측에 봉제박물관 건축이 한창이다.
창신동은 4년전만해도 뉴타운 재개발 대상에 포함되어 마을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다행히도 주민들의 반대로 계획은 무산됐고, 서울시는 노후화된 창신동 구석구석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문화와 공간을 수혈하는 도시로 재생하기로 방향을 전환했다.
지난해 시공 계획을 발표하면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K패션이 전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해주는 봉제산업이 버텨주지 않으면 더이상 성장할 수 없다”며 “현재 사양길로 접어든 봉제산업이 제2의 전성기를 맞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창신동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마을의 역사를 안내해준 문무현 해설사는 도시재생 창신협의회 대표도 맡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박물관 건축 현장을 보여주며 앞으로 기대가 크다고 했다. 문 대표는 창신동에 필요한건 깨끗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재개발’이 아니라 기존의 문화와 역사를 살리는 ‘재생’이라고 말했다.
“채석장에서 쪽방촌, 섬유산업의 근간, 백남준의 생가 등 창신동에는 보존해야할 역사와 문화의 요소가 가득합니다. 공장이 몰려 있던 생산지대에서 관광 명소로 거듭난 성수동 수제화거리처럼 창신동 봉제거리도 외부인이 구경오는 명소로 인기를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역경제도 살고, 봉제산업도 활기를 띄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