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립스틱 왜 안 바르세요? 저도 바르는데…."

서울 논현동 한 초등학교에서 일하는 서모(31)씨는 지난달 자신이 가르치는 초등학년 5학년 여자아이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얼굴이 빨개졌다고 했다. 아이가 열어 보인 작은 손가방에는 알록달록한 크레파스처럼 보이는 어린이 립스틱과 장난감처럼 생긴 반짝이 아이섀도, 스티커처럼 붙일 수 있는 매니큐어까지 들어 있었다. 서씨는 "화장을 하는 초등학생 아이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화장은 나쁘다'라고 말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선생님도 하고 다닐게'라고 대답할 수도 없어서 무척 난감했다"고 했다.

부산 한 백화점 키즈 화장품 코너에 들른 여자 어린이가 입술에 립스틱을 칠하는 모습. 최근에는 청소년 화장의 시작 시기가 초등학교 4~6학년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실제로 요즘 초등학교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화장은 '일상'에 가깝다. 2014년 대한화장품학회가 발표한 '청소년들의 화장품 사용실태 및 구매행동에 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중학교 1학년 여학생 중 32.7%가 "초등학생 때부터 색조 화장을 시작했다"고 대답했다. 2015년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발표한 '화장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보고서를 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재단이 조사한 초등학교 4~6학년 여자 어린이의 45%가 "화장을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문구점은 아이들이 화장품을 처음으로 손에 넣게 되는 대표적인 장소다. 15일 서울 아현동 한 초등학교 앞 문구점에 가봤더니 지우개처럼 생긴 500원짜리 립틴트(입술을 붉게 물들이는 제품), 젤리처럼 생긴 1200원짜리 블러셔(뺨에 칠하는 화장품), 3000원짜리 투명 마스카라 등을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초등학교 4학년 이모(11)양은 "친구들과 재미 삼아 이곳에서 산 립틴트를 발라보기도 하고 때론 서로 생일 선물로 사주기도 한다"고 했다. 문제는 이렇게 저렴한 문구점 화장품일수록 파라벤·디메치콘 같은 유해 물질을 함유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데 있다. WE클리닉 조애경 원장은 "무분별하게 바르고 잘 씻지 않으면 각종 알레르기와 건조증, 염증 등을 겪을 수 있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난 1월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오는 9월부터 기존 12종으로 분류된 화장품 유형에 '어린이용 제품류'를 추가하겠다"고 밝혔다. "어린이에게는 화장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화장품 사용 연령층이 점차 낮아지고 화장하는 어린이가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법 기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어린이 화장품엔 만 13세 이하의 초등학생이 사용하기에 적합한 로션·크림·오일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정작 가장 논란을 낳고 있는 립스틱이나 섀도 같은 색조 화장품 등은 어린이 화장품에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열두 살 난 딸을 키우는 김세빈(40)씨는 "식약처가 가장 빨리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 제품들이 정작 어린이 화장품 규제에서 빠진 것 아니냐"고 했다.

끊임없이 10대 여자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화장법을 쏟아내는 미디어들도 초등학생 화장을 부추기는 또 다른 원인으로 꼽힌다. 유튜브 등에서 '초등학생 화장' '초딩 화장' '10대 화장' 등으로 검색하면 관련 동영상이 10만건 넘게 나온다. 이 중에는 소위 유명 뷰티 블로거가 '어린이 화장품으로 바비 공주 되기' 같은 강좌를 찍어 올리는 것도 있지만, 초등학생 여자아이들이 직접 '메이크업 대결'을 하거나, '트와이스처럼 변신하기' 같은 화장법을 스스로 찍어 올린 동영상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