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오후 서울 서교동 한 타투(tattoo·문신)숍. 33㎡(약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타투이스트(타투 새기는 사람) 3명이 도안(圖案)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벽면엔 사람들이 즐겨 찾는 타투·헤나용 이미지를 담은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다. 눕거나 앉아서 시술받는 가죽 의자 5개가 2m쯤 간격을 두고 조르르 놓여 있는 풍경이 미용실을 연상시킨다.
"왼손 약지에 작은 하트 무늬를 새겨주세요." 흰색 반소매 티에 남색 하이웨이스트 스커트를 입은 20대 여대생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가수 수지가 공항 출국장에서 카메라를 향해 손 흔들 때 잡혀 유명해진 일명 '수지 타투'를 해 달라고 말한다. "타투를 새기기 전에 '헤나'(henna·새기기 대신 그림을 그려넣거나 스티커를 붙여 '지워지는 타투')를 한번 해봐요. 지울 수 있으니 어울리는지 한번 시험해 보세요." 타투이스트의 조언에 여대생은 고심하더니 헤나를 선택했다. 10분쯤 지나자 약지 한 마디를 꽉 채운 선명한 하트 하나가 뚝딱 새겨졌다.
'금기(禁忌)' '혐오'라는 수식이 절로 따랐던 문신(文身)이 달라졌다. 아이의 생일을 팔뚝에 새긴 젊은 부부, 탄탄한 몸매 뽐내려 치골에 섹시한 나비 새긴 여대생…. 이제 기념으로, 장식으로 문신이 소비된다. '문신'이라는 무겁고 마초적인 한자어 대신 '타투'라는 경쾌한 영단어로 옷을 갈아입고 이미지도 한결 가볍게 변신 중이다.
타투, '기억'의 한 방식으로
10년 전만 해도 타투는 주로 '9시 뉴스'에서 접하던 대상이었다. 말(言) 대신 몸으로 소통하는 '깍두기 형님'들이 어떤 연유에선지 경찰서 형사과로 잡혀와 웃통을 벗으면 용과 호랑이 같은 피조물이 온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용호상박(龍虎相搏) 방불케 하던 그 타투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힘깨나 쓴다는 대상만 추린 것으로 보아 상대방을 위협하려는 의도가 다분해보였다. 그래서 타투는 거친 폭력 세계의 하위 문화로 인식됐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타투를 '패션'으로 소비하는 서구 문화가 급속히 퍼지면서 선입견이 서서히 깨졌다. 해외 유명 스포츠 스타와 배우들은 타투에 깃든 부정적 인식을 희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라운드의 섹시남 데이비드 베컴이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에 푹 빠져 주인공 스코필드를 오마주해 양팔과 가슴에 새겨넣은 타투는 여성 팬을 설레게 했다. 국제 빈민 아동 구호 활동에 힘을 쏟아온 배우 앤젤리나 졸리가 목덜미 아래 자신이 전 세계 아동에게 전해온 메시지 'Know Your Right(네 권리를 알아라)'를 새긴 행위는 '용감 있는 사회 참여'로 해석됐다.
타투이스트 한용규씨는 10년 새 생긴 변화로 '성별·연령대의 확장'을 꼽았다. 그는 "아이들이 태어난 곳의 위도와 경도를 왼팔에 새겨넣은 앤젤리나 졸리를 보고 아이 이름 새기러 오는 부모들도 있다"며 "타투가 단순한 멋을 넘어 '기억'의 한 방식으로 소비되면서 인생의 한순간을 몸에 담아두러 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몸으로 나를 말하다 vs 시각적 거부감 들어
직장인 김성태(가명·29)씨는 쇄골 아래에 욥기 8장 7절에 나오는 성경 구절 '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구절을 새겼다. "마음에 늘 새기고자 하는 것을 몸에도 새겼다"고 했다. 그래도 남의 시선을 온전히 떨치진 못해 옷을 입으면 잘 안 보이는 신체 부위인 쇄골을 선택했다.
시민운동가 김난영(가명·32)씨는 이번 달 대선 전까지 지지하는 후보의 영문 이름을 왼팔목에 헤나로 새겼다. 김씨는 "한국 사회는 정치적 발언에 유독 소극적이라 이번 대선에선 정치적 의사를 선명하게 표현해 보려고 시도해 봤다"면서 "헤나가 잘 드러나도록 반소매를 입고, 이것에 호기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으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했다. 대선이 끝난 뒤엔 헤나를 지운 그녀는 "사회에 피력하고 싶은 메시지가 생길 때마다 헤나로 새기고 다닐 계획"이라고 했다.
타투는 패션의 일부로도 인식된다. 직장인 김민지(29)씨는 치골에 타투를 새겼다. "열심히 가꾼 몸매에 화룡점정을 찍으려고 타투를 새겼어요. 혹독한 자기 관리로 유명한 한 모델이 치골에 '나에게 양분을 주는 것은 나를 파괴한다'는 문구를 새긴 걸 보고 따라 새겼지요." 하지만 문신을 꺼리는 부모님이나 몇몇 친구 앞에선 이 사실을 숨기고 다닌다. "부모님 앞에서 문신 이야기를 꺼냈다가 혼쭐이 났어요. 옷 갈아입을 때 혹여 부모님이 보시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때도 있지요. 문신 자체는 후회하지 않지만, 이걸 불편해하는 시선도 이해해요."
절제의 대상 몸, 자기표현 수단이 되다
전문가들은 타투 열풍을 신체를 캔버스 삼아 메시지를 담아내는 '몸 담론'의 일부로 해석한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타투는 자기 기억을 확장하고 정체성을 표현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보인다"며 "억압과 통제의 대상이던 몸이 자기 표현의 한 수단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타투가 지닌 전복(顚覆)적 속성이 젊은 층에 쾌감을 주기도 한다. 대학생 홍범준(25)씨는 "터부에 반기를 든다는 데서 오는 저항감과 은밀한 소비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