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4일 조선일보는 지령 3만호를 맞습니다. 지령은 신문[紙]의 나이[齡]란 뜻이에요. 신문을 낸 날짜를 하루하루 세어 3만번째라는 말이지요. '3만호'라고 하니 그다지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요? 신문이 1만호가 되려면 1년 365일 쉬지 않고 내도 30년 가까이 걸립니다. 3만호를 내려면 90년이 지나야 하는 거지요. 갓난아이가 아흔 살이 되는 긴 세월이에요. 지령 3만호는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기록입니다.

1920년 3월 5일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 창간한 조선일보는 '최초(最初)' 기록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3년 후인 2020년 3월이면 대한민국 언론 최초로 100주년을 맞는 신문이 되고요.

1924년 10월 13일 조선일보에 실린 신문 최초의 연재만화 ‘멍텅구리’.

요즘 '웹툰'(인터넷 연재만화)이 인기지요? 그 원조 격인 신문 연재만화는 조선일보가 최초입니다. 1924년 10월 13일 4단 만화가 첫선을 보였어요. '멍텅구리'라는 제목의 만화입니다. 학예부 기자인 동양화가 노수현이 그린 이 만화는 멍청한 키다리 '최멍텅'과 그를 놀려먹는 땅딸보 '윤바람'이 기생 '신옥매'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시대 상황과 맞물린 스토리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2년에 걸쳐 600회 가까이 연재됐어요. '멍텅구리'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만화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답니다.

수습기자를 지금처럼 공채 시험을 통해 뽑은 때는 언제일까요? 조선일보는 1930년 4월 15일 민간지 사상 처음으로 기자 공채 시험을 치렀어요. 앞서 4월 3일 '기자와 사원 채용 시험' 공고를 냈습니다. 당시 기자 시험 문제가 궁금한가요? 시험은 세 과목이었어요. 논문, 기사 작성, 상식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가〉 나는 왜 신문기자가 되려는가(논문), 〈나〉 종로 종각에 불이 났다면 어떻게 무엇을 조사 보도할까(기사문), 〈다〉 다음 단어를 간단히 해설하라. 데몬스트레이션, 조광조, 베르사이유, 모라토리엄, 아관파천, 스탈린….' 쉽지 않죠? 당시 120명이 응시해 최종 9명이 합격했습니다. 시인 김기림이 공채 1기 기자였습니다.

지금은 휴대전화를 통해 언제든 상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세상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잖아요? 일제강점기인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 때 조선일보는 언론사상 최초의 국제전화 취재로 마라톤 손기정 선수의 소식을 생생히 전했습니다. 도쿄 지국장 김동진 기자는 손기정이 마라톤에 출전하기 직전인 8일과 우승 후인 10일 두 차례에 걸쳐 베를린에 국제전화를 걸어 손기정 선수의 목소리를 전했습니다. 김동진 기자는 "백림(베를린)-동경(도쿄) 간 구천키로의 장거리 국제전화를 통하야 마주 앉은 듯이 우리말을 주고받기는 실로 최초의 기록"이며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역사적 국제전화"라고 썼습니다. 당시 베를린까지 국제전화는 3분당 100원이었답니다. 당시 기자 월급의 2배였어요. 김동진 기자는 통화료 300원에 해당하는 9분간 통화를 통해 손기정 선수의 출전 전 각오를 독자들에게 전했습니다.

두 번째 통화는 손기정이 우승한 다음 날인 10일 오후 6시 50분(베를린 시각 오전 10시 50분) 연결됐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전화선 너머에서 한참 흐느껴 울더니 "이기고 나니까 웬일인지 기쁘기보다 서러워져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김동진 기자는 "3분간 100원의 전화료가 아무리 비싸다 해도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 인터뷰를 보도한 조선일보 1936년 8월 9일자.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우리말의 국제전화’라는 제목을 달았다. 오른쪽은 최초의 기자 공채를 알린 1930년 4월 3일 사고(社告).

이 밖에도 최초의 라디오 공개 방송(1924년), 최초의 항공기 취재(1934년), 최초의 다색쇄 윤전기 도입(1970년) 같은 기록이 수두룩합니다. 참, 빠뜨릴 뻔했네요. 최초의 민간 신문 여기자 최은희(1904~1984) 선생 이야기입니다.

동경 일본여대 3학년이었던 최은희는 1924년 10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습니다. 최초의 민간지 여기자입니다. '민간지'라고 한 이유는 1920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여기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은희 기자는 당대 최고의 여기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1983년 평생 모은 돈 5000만원을 조선일보에 기탁해 '최은희 여기자상'을 제정했습니다. 조선일보는 이듬해부터 지금까지 매년 뛰어난 활동을 펼친 여기자에게 '최은희 여기자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