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개척자 또는 선구자라고 부른다. 낯선 세계의 선두에 서서 '대한민국 1호' 타이틀 거머쥔 사람들의 얘기를 모았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 권일용 경찰청 범죄행동분석팀장(경감)은 1989년 순경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한 뒤 일선 형사와 현장 감식 요원을 거쳐 2000년부터 지난 4월 퇴직할 때까지 프로파일러로 활동했다. 경찰 근무 기간 27년 8개월의 대부분을 범죄자와 씨름하며 보낸 것이다.

처음부터 프로파일러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고 부모님의 권유로 경찰이 됐다. 막 순경티를 벗을 때쯤 서울시경(현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기동대에 배치돼 '범죄와의 전쟁'에 투입됐다. 살인·마약·인신매매 같은 범죄 세계와 본격 대면했다. 2년쯤 전쟁을 벌이다 1993년 서울 동부경찰서(현 광진경찰서)로 발령 나면서 과학수사라는 새 분야와 만났다.

지문 채취를 잘해 특진까지 했던 권 경감을 프로파일러로 발탁한 것은 윤외출 당시 시경 감식계장(현 경무관)이었다. 경찰 내부에서 프로파일러 양성을 추진하면서 후보자를 물색하다 권 경감을 선발한 것이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가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그동안 범죄심리 전문가들의 세미나를 쫓아다니고 40년 치 살인사건 자료를 분석했다. 17년간 프로파일러로 분석한 범죄자만 900명이 넘는다. ▶기사 더보기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 출신인 최무배 선수는 2004년 일본의 종합격투기 대회 프라이드(PRIDE)에 한국 최초로 진출한 인물이다. K-1을 비롯한 국내외 경기를 치렀고 요즘은 우리나라 종합격투기계의 개척자로 불린다.

운동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레슬링 주니어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지만 메달을 따지 못했다. 방황을 하던 무관(無官)의 레슬러는 격투기에 마음을 뺏겼다. 2003년 11월 일본 도쿄 돔에서 열린 프라이드(PRIDE)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에서 '챔피언 표도르의 마무리 기술 시연' 이벤트를 열었다. 이름은 거창했지만 관람객을 대상으로 표도르가 레슬링 기술을 걸고, 상대방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표도르의 힘 자랑, 기술 자랑' 행사였다. 그런데 표도르가 기술을 걸었는데도 넘어지지 않는 관람객이 나타났다. 최무배였다. 관람객들이 웅성댔다.

격투기 선수를 할 생각은 없었으나 이후 도장에 격투기를 배우고 싶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선수를 하면 도장 홍보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그는 2004년 일본의 종합격투기 대회 프라이드(PRIDE) 링 위에 섰다. 8연승을 앞둔 소아 파렐레이를 상대로 경기를 펼쳤다. 파렐레이가 먼저 지쳤다. 이 경기 이후 그의 이름 앞엔 '부산 중전차(重戰車)'란 수식어가 붙었다. ▶기사 더보기

서한정 한국와인협회 초대 회장은 1976년 국내 소믈리에(와인전문가) 1호로 출발해 40여년간 와인과 더불어 살아왔다. 소믈리에는 식당에서 사용할 와인을 구매·관리하고 손님들에게 요리나 취향에 맞는 와인을 골라주는 와인 전문가다. 그동안 와인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직업이었으나 최근 와인 소비량이 많아지면서 소믈리에라는 직업도 주목을 받고 있다. 순천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했던 서씨는 군 복무 중 월남전에 다녀온 뒤 인생 진로를 바꿔 호텔에 입사했다.

웨이터와 바텐더를 거쳐 76년 서울 플라자호텔로 옮겨가면서 소믈리에 직함을 달았고 84년부터 신라호텔에서 근무해왔다. 서한정 회장은 2000년에 프랑스 정부가 주는 농업공로훈장 '메리트 아그리콜'을 장폴 레오 주한 프랑스 대사로부터 받았다. 1883년 제정돼 1884년 파스퇴르 박사도 받은 권위 있는 이 훈장을 한국인이 받기는 처음이다. 프랑스 와인을 한국에 널리 알리고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는 공로다. ▶기사 더보기

이동진 국제바리스타협회장은 우리나라에 바리스타라는 말이 정착되기 전부터 바리스타였다. 커피를 전문적으로 만들어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바리스타는 말이 정확한 개념을 잡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데는 그의 공이 컸다. 2008년 노동부 산하의 한국직업고용정보원에서 바리스타가 직업으로 등재될 때 직업의 정의 등을 정리하는 역할을 했으며, 2007년 커피 열풍을 불러왔던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주인공들의 커피 선생님으로 활약했다.

대학에서 광고를 전공한 그가 커피를 만난 것은 일본 유학생활을 하면서부터다. 일본 유학시절, 커피에 크게 흥미를 가진 그는 귀국 후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커피에 대한 지식과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는 활동에 힘을 쏟아왔다.

(왼)신의주고보 동창들의 해후. 오른쪽부터 신상초, 김준섭, 최창봉.

고(故) 최창봉 전 한국방송인회 이사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드라마 PD이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연출을 처음 실시했을 때 상황을 "당시 우리나라엔 TV 연출을 어떻게 하느냐를 제대로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어요. 동료들과 '텔레비전 프로덕션'이라는 외국책을 공동으로 번역해가면서 연출이 뭔지 공부하던 시기였죠."라고 회고했다.

군 방송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일하면서 방송과 인연을 맺었던 그는 1956년 2월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방송국 KORCAD(HLKZ-TV)의 개국 프로듀서로 합격했다. 같은 해 5월 12일 첫 전파를 발사한 이 방송국에서 그는 연출과장으로 발탁돼 텔레비전 방송 창설 주역을 담당했다. 처음 연출했던 프로그램은 개국식 실황. 그 후 그가 연출한 방송이 우리나라 최초의 TV 드라마 '천국의 문'이란 30분짜리 생방송 작품이었다. 드라마 '사형수'를 최초의 TV 드라마라고 기록해 놓은 자료가 꽤 많은데, 최 이사장은 "'천국의 문'이 몇 달 먼저 나온 작품"이라고 정정했다. '사형수'는 1시간 30분짜리 드라마였다. 김경옥·오사량·최상현 등 제작극회 배우들이 출연한 이 드라마는 카메라 두 대로 연출해 생방송으로 전파를 탔다. ▶기사 더보기

한국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든 사람은 만화가 고(故)신동헌 화백이다. 오늘날로 치면 최초의 애니메이션 제작자이자 감독이다. 그는 국내 최초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1967)으로 '한국 만화영화의 아버지'로도 불려왔다. 이 작품은 당시 '소년조선일보'에 연재되던 동생 신동우 화백의 '풍운아 홍길동'을 영상화한 것으로 그해 대종상영화제 문화영화작품상을 받았다. 만년작인 '돌아온 영웅 홍길동'(1995)은 그해 대한민국 영상만화대상 대상을 받기도 했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신 화백은 서울대 건축과를 다니던 중 학비를 벌기 위해 서울 충무로에서 초상화를 그리다 시사만화 '코주부'의 김용환 화백을 만나 본격적으로 만화에 뛰어들었다. 만화 '스티브의 모험'(1947)으로 데뷔해 국내 최초의 만화 단행본 '고양이 탐정'(1947) 등을 발표하며 국내 주요 일간지에 명랑 만화와 시사만평을 연재했다. 1954년엔 김용환 화백과 함께 대한만화가협회를 발족했다. 기발하고 엉뚱한 것을 좋아했던 신 화백은 "만화는 되도록이면 원칙에서 이탈하는 게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왼)명동에서 '노라노의 집'을 우영하던 30대의 노라노씨의 모습.

대한민국 패션계의 전설 디자이너 '노라 노'는 국내 패션디자이너 1호이다.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1952년 서울 명동에 부티크 '노라노의 집'을 연 뒤 대한민국 1호 패션 디자이너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

부친 노창성은 일제강점기에 경성방송국을 창립한 주역이고, 모친 이옥경은 경성방송 초대 아나운서였다. 유복한 성장기를 보냈던 그는 경기여고 졸업 후 장교와 결혼, 1년 만에 이혼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본명은 노명자. '노라'라는 이름은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 그녀처럼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1947년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만 해도 이혼은 여성의 최대 수치여서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낮에는 디자인 공부하고 밤에는 공장에서 재봉틀을 돌리며 주경야독한 노라노는 프랭크 왜건 테크니컬 칼리지를 졸업하고 돌아와 1952년 서울 명동에 의상실 ‘노라노의 집’을 연다.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패션쇼는 노라노의 것이었다.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씨는 "불우한 시절을 이겨내고 패션세계를 개척한 샤넬처럼 황무지 대한민국에 패션사를 열어준 여인이 노라노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미니스커트도 판탈롱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기사 더보기

(오)앙드레김과 1963년도 첫 직업모델 조혜란의 모습.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패션모델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직업 모델이 나온 것은 1964년 3월 국제복장학원 원장 최경자씨가 전문 모델을 양성하기 위해 '차밍스쿨'을 열면서다. 1회 졸업생이 조혜란, 한성희, 송영심, 김혜란 등으로 이들이 직업모델 1호다. 이들은 워킹 등 모델 트레이닝을 받았다. 특히 이화여고 출신인 조혜란은 특급 모델로 인정받았는데, 이미 1963년 봄 ‘앙드레 김’ 의상발표회(앙드레 김과 조혜란)에 첫선을 보였고 TV쇼 등에도 출연했었다. 조혜란은 키가 165㎝였다. 당시 활동했던 1세대 모델은 하나같이 키가 160㎝ 안팎의 아담하고 단아한 여성이었다.

이 판도를 바꿔놓은 게 1985년 미국에서 귀국한 모델 김동수다. 김동수 동덕여대 교수는 "내가 귀국한 이후로 키 175㎝가 넘는 훤칠한 모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예쁘고 귀여운 여성보단 개성 있는 모델이 주목을 받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1992년엔 모델 이소라가 '슈퍼모델 대회'에서 1위를 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최근엔 장윤주·강승현·한혜진 같은 모델들이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 컬렉션 무대에 서는 등 외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기사 더보기